2009년 11월 09일
자주국방 KFRX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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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
"경고! 적 접근!"
"너 진짜 개량된 건 맞냐?! 왜 이리 둔해!"
분명히 모든 면에서 개량되어진 'KFRX1 A1'이지만, 워낙에 루트가 늘 성능으로 압도하다보니
김병장은 도저히 피부로 체감을 못하며 엄한 설웅만 탓했다.
"닥치고 저거나 막아!"
"우이씨!"
적이 접근하자 견제를 위해 띄워놓은 가교가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착검한 글라디우스 하나 빼면 완전히 몸으로 때워야 하는 상황이 되 버린 것이었다.
"거리 200!"
"말이 200이지!"
엎드려 포 닿을 거리까지 육박한 루트가 왼팔을 높게 치켜들어 설웅제를 후려치려 했다.
"가드!"
엉겁결에 김병장은 막는다는 생각을 이상하게 말해버렸지만,
말이 어떻든지 설웅제는 오른팔을 90도로 굽힌 채 날아오는 빔소드를 글라디우스로 막아냈다.
"아저씨! 왼쪽!"
"이아아아!"
루트가 세련된 검사라면 이쪽은 저돌적인 전사였다. 루트가 오른팔로 설웅제를 재차 내려치려 했지만
타이밍 좋게 설웅제는 왼팔로 루트의 팔을 붙들 수가 있었다.
"잡았다!"
"쳇! 출력이 딸려! 넘어간다!"
잡았다고 좋아하는 김병장과 달리 설웅은 힘 앞에 무너지는 자신을 느끼며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그대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한 루트는 설웅제를 눈밭 위에 자빠트려버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봐!"
"아저씨 조심해! 단검이다!"
설웅의 주의와 동시에 모니터에 적색 박스가 루트의 오른손아귀에 고정되었고, 아니나 다를까.
루트가 쥐고 있는 칼자루의 기다란 빔날이 접혀들더니 칼자루 아래로 짧은 빔날이 대신 튀어나왔다.
"설웅! 가교로 어떻게 좀 해봐!"
"안 돼! 너무 늦어!"
[ 어려울 땐 부르세요~ 육군의 친구 공군! ]
"베르쿠트!"
위기의 순간, 링크를 타고 흘러들어온 쾌활한 소리와 동시에 루트의 등 뒤에서도 큼직한 섬광이 쾌활하게 터져올랐다.
"설웅! 고개 돌려!"
"자꾸 이래라 저래라야!"
충격으로 루트가 왼손에서 칼자루를 놓치자, 찰나의 순간 설웅제는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크읏!"
무언가에 화끈 데인 아픔을 느끼며 설웅은 자신의 왼쪽 귀를 감싸 쥐었다.
떨어진 칼이 머리 왼쪽을 스치며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자식! 생긴 건 꼭 골동품 갑옷 같은 게!"
완전히 감이 돌아온 김병장의 생트집 잡는 소리와 함께 설웅제는 있는 힘껏 양 팔로 루트를 밀쳐내자,
눈앞을 가리고 있던 거대한 푸른 갑옷덩어리가 사라지며 시야가 훤해졌다.
"저게 신형이구나."
합체한 채 돌아온 새하얀 베르쿠트는 이마에 박힌 금색 쌍두독수리 문장을 반짝이며
총구에 대검을 끼워놓은 드라구노프 형태의 76.2cm 이온 저격총을 든 채 하늘 위에 당당히 버티고 떠 있었다.
"베르쿠트. 이거 가지고는 택도 없는데?"
"원래 무기는 배치 순간 구식이잖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A급 입니다."
"칫, 첫 등장에 합체장면도 신경 안 쓰고 무기는 먹히지도 않고…"
"대위님. 나누크가 뭘 하려는 것 같습니다."
"왔구나."
베르길로프가 고개를 쳐들어 조종실 천장의 모니터를 쳐다보자
RFRX 이마의 루비별을 동토의 햇살에 반짝이며 나누크의 위압적인 얼굴도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자! 나누크!"
"Да!"
탄막사격이 잦아진 틈을 타 다시 한 번 하얀 거인이 가교를 앞세우고 설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경고! 14시 상방 적 비행체!"
"공군이 알아서 하겠지!"
[ 딩동댕~! ]
베르쿠트의 전면 모니터에 응집 사격 대형을 취하려는 세대의 비행체가 표적으로 고정되었다.
"사격!"
의묘제의 1.27m 대물 저격총에 비하면 훨씬 약하지만 그만큼 연사력이 좋은
76.2cm 이온 저격총이 하늘에 세 개의 빗살을 만들어냈다.
"전 목표 명중… 경고. 비행체 다수 증원!"
"아주 바퀴벌레 알집이 따로 없네."
"거리 80! 왼쪽!"
"막아!"
가교를 앞세우고 파고든 나누크를 루트가 오른손으로 옮겨 잡은 빔소드로 후려쳤지만
또 다시 가교 방패에 빛만 난반사될 뿐이었다.
"나누크! 공간파!"
"Да!"
나누크의 글라디우스가 공간파 진동을 일으키며 루트의 동체를 향해 날아드는 모습이
루트의 조종석 모니터에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제길! 빗나갔다!"
루트의 복부를 노린 일격은 베르길로프의 탄식과 함께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가볍게 날아오른 루트는 검을 잃어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나누크의 어깨를 짚으며 말 그대로 재주를 넘고 있었다.
"Проклятье!"
베르길로프가 욕설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자 후방모니터에 비추어진
루트의 거꾸로 선 두개의 적색 광학센서와 눈이 마주쳤다.
[ 베르길로프! ]
[ 소령! 엎드리십시오! ]
"KFRX 입니다!"
"나누크! 포복해!"
완전히 등이 빈 채 일격을 당하기 직전, 설웅제가 나누크의 정면으로 달려들며 뛰어오르자
나누크는 그 밑으로 파고들듯이 야구선수의 슬라이딩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저씨! 어금니 꽉 깨물어! 충돌!"
"읍!"
가교를 회수한 왼팔을 가슴에 붙인 채 달려든 설웅제가 방패로 루트를 쳐내자,
동토의 대기가 다시금 찢어지며 두 거체가 눈밭 위에 마구 나뒹굴었다.
"아야야… 어…떠냐!"
"넌 지금 루트를 잡는 거냐 날 잡는 거냐…"
하지만 공격받은 루트보다 김병장이 데미지를 더 입었는지 정작 루트는
툭툭 털고 일어나듯 벌떡 일어나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었다.
"좋아! 지금부턴 나하고 한곡 추자고!"
주변에서는 루트의 무선유도 비행체들이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틈만 나면 빔을 쏘아대고 있었지만
베르쿠트는 러시안 나이츠의 곡예비행처럼 100m 크기의 백조 같은 미끈한 동체를 아름답게 움직였다.
"베르쿠트! 적의 어깨를 조준해!"
"조준 완료!"
"사격!"
그 와중에서도 찰나의 틈에 베르쿠트는 루트를 노리고 사격을 퍼붓자,
말 그대로 루트는 공중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듯 이리저리 돌며 날아오는 이온 덩어리들을 피해버렸다.
"경고! 적이 비행체를 결집합니다!"
"좋잖아? 적도 신났는데!"
"농담이 나오십니까? 일제사격입니다!"
베르쿠트의 말대로 루트는 공중에서 자체를 고쳐 잡더니 비행체들을 자신의 등 뒤로 모아 사격을 개시했다.
"적 접근!"
"프롬에서도 이런 춤은 못 춰봤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일제사격으로 베르쿠트의 움직임을 봉쇄한 채 육박한 루트의 빔소드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움직임을 소화해내던 베르쿠트의 드라구노프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크읏! 역시 출력에서는 밀리네?"
"대위님! 물러나십…!"
순간, 후방석에 앉아있던 베르쿠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르쿠트! 왜 그래?!"
"무, 물러나십시오! 이건!"
"치잇! 알았다고!"
리트비야크는 루트를 떨쳐내기 위해 오른다리로 루트의 복부를 찍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루트의 왼팔이 베르쿠트가 움직이기도 전에 무릎이 날아올 곳으로 손바닥을 펼치는 것이었다.
"잡혔어?! 크읏!"
순식간에 모니터는 또 다시 땅과 하늘이 바뀌어 버렸다.
한쪽 다리가 잡힌 베르쿠트를 루트가 냅다 집어던진 것이었다.
"우웃~!"
리트비야크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격렬한 기동 속에서도 용케 기체의 균형을 다시 잡았다.
"베르쿠트! 왜 그래? 움직임이 갑자기 느려졌어!"
"대위님. 움직임이 느려진 게 아닙니다. 적이 먼저…"
[ 대위! 피해! ]
"웃!"
응집된 빔이 베르쿠트를 노리고 날아들자 본능에 가까운 조작으로 베르쿠트는 그 사선을 피했지만,
회피한 자리를 노리고 일제 사격된 빔이 장대비처럼 날아들었다.
[ 안 피하고 뭐하는 거야! ]
위기의 순간, 지상에서 대응한다는 원칙을 깬 나누크가 베르쿠트의 앞을 가로막으며 가교로 일제사격을 막아내었다.
"나누크! 어떻게 된 건가?"
"시험 중인 기체라 에러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베르쿠트와 링크 중… 경고! 프로그램에 허용되지 않은 침입입니다!"
"이런! 해킹인가!"
"프로그램 보안을 올리겠습니다."
[ 가라 가교! ]
공중에서 심상찮은 움직임이 보이자, 마침내 설웅제도 가교를 먼저 날려 앞세운 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여기는 설웅제! 나누크! 무슨 일이야?!"
[ 설웅! 적의 해킹 공격이야. 조심해! ]
"설웅. 해킹이라면… 설마 그!"
"치잇. 역시 허용되지 않은 무언가가… 걱정 마 아저씨.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설웅! 적이 움직인다!"
베르쿠트와 나누크의 움직임이 둔해진 틈을 타서 루트는 고도로 급상승시키며
자신의 발아래에 비행체들을 포진시켰다.
"가교! 목표 적 비행체! 악몽의 정체가 이거였나…"
왼쪽 송곳니로 붉게 칠해진 입술을 꼭 깨물면서도 설웅이 산출해낸
최적 공격 경로를 따라 가교가 적 비행체를 노리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잠깐. 뭐야 저건!"
"공격 경로를 파악하고 피해?!"
루트의 비행체는 가교가 빔을 쏘려는 경로를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ㄷ자로 접혀진
가교의 중앙부에서 빔이 충전되어 발사되기도 전에 그 진로에서 일지감치 흩어지는 것이었다.
"베르쿠트! 봤지?"
그제야 베르쿠트는 금빛 도는 흑발을 흔들며 정신을 차리는 모양이었다.
"예. 적은 해킹으로 아군의 기동 경로를 파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막을 방법은?"
"그게… 경고!"
"알았어! 피하면 되잖아!"
발아래의 FRX들을 향해 루트의 비행체들이 광범위한 영역에 소나기 같은 빔을 뿌려대었다.
"하나, 둘, 셋, 넷… 20개쯤 되는 건가?"
[ 이런. 탄적재만 했어도 강철의 오르간으로 진작 날려버렸을텐데 말이야. ]
나누크의 등 뒤에 달린 2MS19 FRX의 텅 빈 발사관들을 생각하는 베르길로프의
무미건조한 탄식소리가 통신을 타고 흘렀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안전지대로 대피한 지휘차량 안에서 예게네프는 두툼한 턱을 붙잡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통신장교. 아직도 대대와 통신은 불통입니까?"
"예. 기술부장님."
"흠… 만약 통신이 된다면 AFRX의 전자전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저기, 예게네프 기술부장?"
"뭡니까. 미코야노비치 수석?"
날카로운 안경중년이 스크린 속 설웅제의 모니터링 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 생각에는 설웅제라면 이 해킹 공격에서 자유로울 거라 생각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직접 만들고도 모르십니까? 설웅제는 트윈 MSN. 말하자면 듀얼 코어잖습니까."
꽤나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예게네프는 오히려 그 말에 무릎을 탁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렇군요! 그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 여기는 예게네프. KFRX I 설웅제 응답하라. ]
"설웅제 수신. 무슨 일이십니까?"
[ 설웅. 잘 들어라. 지금 적의 해킹공격으로 공격루트가 파악된다는 건 잘 알거다. ]
"당연한 소리 하시려고 부른 건 아니시겠죠?"
[ 당연하지. 지금 너의 트윈 MSN으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 상황을 뒤집을 건 너 밖에 없어! ]
예게네프는 오직 '트윈 MSN'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순식간에 눈치를 챈 설웅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 왜 그러나 설웅? ]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상."
고민하며 말을 흐린 설웅은 프로그램이 복잡해졌다.
'아저씨한테 맡겨도 괜찮을까?'
'언니, 지금이 바로 믿어줄 때잖아.'
'아무리 그래도 못미더워.'
'그럼 차선책을 찾아보던지.'
사람으로 치면 생각으로 혼자 놀기를 하던 설웅이 마침내 결과 값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 나누크! 베르쿠트! 여기는 설웅제! 적을 직접 노리겠습니다. 엄호하십시오! ]
"설웅. 어떻게 하려고?"
"아저씨. 잘 들어. 지금부터 난 방화에 집중할거고 나머지는 화이트가 맡아서 할 거야.
그럼 조종은 순전히 아저씨가 집중해야 해."
"잠깐! 내가?!"
"아저씨가 약 먹은 건지 모르겠지만 제법 하잖아? 그러니까 좀 더 힘내봐."
"…"
"이 양반 보게나? 언제는 안 믿어준다고 난리더니 이번엔 믿어준다고 해도 싫어?"
"알았어. 그나저나 너 이중인격, 아니 트윈 MSN인게 이럴 땐 좋다?"
"아저씨는 여기서 살아남으면 내손에 죽을 줄 알아."
으름장을 놓으며 설웅은 도끼눈을 흘기며 주먹을 쳐들어보였다.
"이야, 그 소리 들으니까 나 긴장 타는데."
"자꾸 까불래?"
[ 설웅. 나 베르길로프인데. 거 작전 세웠으면 부부싸움은 있다가 하면 안 될까? ]
"소령! 누가 부부입니까!"
"베르길로프 너도 세트로 죽일 거야! 아무튼 작전 개시!"
설웅의 선언과 함께 조종석 모니터에는 기체 일부 기능의 사용불능을 알리는 빨간 표시가 여기저기 떠올랐다.
"?!"
동시에 루트의 조종석에서는 뾰족귀를 가진 금발묘령의 아가씨는 눈을 치켜뜨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세대의 FRX의 예상 경로를 표시하던 마크 중 설웅제의 마크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소령님! 설웅제가 돌격합니다!"
나누크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RFRX 나누크 옆을 KFRX 설웅제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며 수직으로 상승했다.
"아저씨. 많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냥 적하고 부딪혀버려!"
"말시키지 마! 나 지금 운전하잖아!"
운전경력, 아니 조종경력 근 1년의 김병장은 마치 첫 단독주행에 바짝 쫄은 초보운전자 같았다.
설웅이 완전히 프로그램 방화를 실행중이라 기체의 조종 연산을
화이트의 프로그램이 맡은 상태지만 그것으로는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됐어 베르쿠트! 적도 당황했어!"
"설웅제. 루트와 충돌합니다!"
모니터에 루트와 설웅제 사이의 간격과 속도 등을 나타내는 데이터가 초시계보다도
빠르게 줄어들더니 마침내 그 둘이 적색 테두리로 둘러쳐졌다.
"받아라!"
김병장이 왼팔을 크게 휘두르는 생각을 하자 가교방패를 낀 왼팔이 크게 움직이며 루트를 후려쳐냈다.
"큿! 움직임이 너무 커!"
"미세 필터링을 내가 못하니까 그래! 침착해 아저씨!"
하지만 설웅제의 움직임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은
루트는 빔소드의 출력을 올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설웅! 막아!"
"바쁘니까 니가 좀 하세요!"
"아차!"
늘 하던 대로 하려던 김병장은 퍼뜩 제정신을 차리며 거대한 가교로 기체를 가렸다.
"큿!"
선팅이 된 헬멧 바이저가 번쩍거리는 빛을 가려주며 비추는 가교 너머로 빠끔히 보이는
루트의 에머랄드색 렌즈에 김병장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아저씨! 정신 차리고 계속 움직여!"
"칫! 아래!"
서로 엉켜있는 순간 루트는 왼쪽 무릎으로 설웅제를 걷어차려 했지만 거의 동시에 설웅제가
오른쪽 무릎을 세우는 바람에 그 공격은 막히며 두 기체의 중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저리!"
두 기체의 중심이 무너지며 설웅제가 위에서 덮쳐 내리는 자세가 되자 김병장은
그 힘을 이용해 방패로 루트를 손쉽게 밀어 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싸움으로 한쪽 검을 잃은 루트는 순간 안아달라는 것처럼
양팔을 벌리는 자세로 완전히 기체 전체를 무방비로 노출하고 말았다.
"꺼져!"
[ 글라디우스. 공간파 충전 ]
모니터에 글라디우스의 상태창이 확대되며 공간파 충전율이 표시되자
오른팔에 착검된 검의 몸체가 공간파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끝이다!"
설웅제의 거대한 팔이 제대로 한대 먹이려는 싸움꾼처럼 있는 대로 뒤로 어깨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음속을 가볍게 넘어 충격파를 만들어내며 루트의 가슴 한복판에 내리꽂혔다.
"…뭐지 이건?!"
"프로그램 정상화. 경고. 적 반중력 방어장 가동!"
상황이 다급해지자 프로그램 방화를 종료한 설중이 다시 기체를 정상화시키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칫! 이쪽 공간파보다 저쪽 출력이 더 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설웅제의 칼끝은 금세라도 루트의 가슴 장갑을 꿰뚫을 것처럼
그 위에 고정된 채 더 이상 들어가지를 못하고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때, 루트의 왼쪽 가슴 위로 한줄기 푸른빛이 솟구쳐 올라왔다.
"읏! 근접병기인가?!"
"아냐! 저것 봐!"
[ 오, 이제 좀 먹히는 건가 베르쿠트? ]
[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대위님. ]
설웅제와의 전투로 루트의 견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베르쿠트의 76.2cm 저격총에서 발사된
이온펄스가 루트의 등 뒤에 작렬했다. 그리고 베르쿠트의 말 대로 몹시 운 좋게도
비행체를 사출하던 발사셀의 이음새가 피탄 된 덕에 그대로 이온 펄스가 루트의 가슴을 꿰뚫어버린 것이었다.
"대위님. 비행체가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멈춘 정도가 아니라 아주 추락하는데?"
리트비야크의 말대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비행체가 마치 약 먹은 날파리떼처럼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관통된 곳에 비행체를 총괄하는 유도장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쳇, 저런 운은 이런데 쓰지 말고 복권 사는데 썼어야 하는데."
"예, 예. 정말 군인정신의 귀감이십니다."
[ 대위. 감탄만 하지 말고 빨리 설웅제를 지원하라. ]
"들었지 베르쿠트? 일단 이탈해서 전장을 넓게 가지고 지원한다."
"Да!"
적의 봉쇄에서 풀린 베르쿠트가 나누크에게서 떨어지며 푸르고도 시린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모니터로 지켜보며 베르길로프는 마치 공중에서 배영을 즐기듯 기체를 수평으로 만들며 외쳤다.
"나누크! 주포 전개!"
"Да!"
나누크가 명령을 실행하자, 등 뒤에 달려있던 나누크의 주포가 허리에 장착되며
길이 100m, 구경 12.5m의 거대한 주포로 전개되었다.
"목표. 적 루트!"
"조준 완료!
"설웅. 김 중위. 떨어져라!"
[ OK! 아저씨! 이탈한다! ]
"Огонь!"
베르길로프의 강철 같은 명령과 함께 포신이 빛으로 차오르며 하늘 위의 루트를 향해 대질량탄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설웅은 루트에게서 급속히 이탈하며 대질량탄이 루트와 충돌하는 순간을 데이터로 모니터에 표시하였다.
"3, 2, 1. 명중!"
"해치웠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설웅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는 것처럼 루트는 그 자리에 더 이상의 상처 없이 버티고 서 있었다.
"적 건재! 이공간방어장 가동 확인!"
"저게 말로만 듣던… 정말 놀라워."
FRX의 무기체계중 최고수준의 화력을 자랑하는 대질량탄조차
완벽하게 막아버리는 이공간방어장을 보며 리트비야크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진짜 아까건 운이 좋았네."
[ 베르쿠트! 여기는 나누크! 들립니까? ]
"예, 베르길로프 소령.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 어떡하긴 어떡해. 한대 더 때리면 되지. ]
"…예?"
곰하고 친하게 지내다보니 베르길로프도 곰이 됐는가 싶은 미련한 소리에 리트비야크는
헬멧 속에서 왼쪽 눈썹을 까닥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의문은 이어진 설웅제의 통신으로 가로막히었다.
[ 그래. 그리고 한발이 안 되면 두발을 동시에 먹여주자고. 나누크! 이쪽은 언제나 OK! ]
[ 알았어 설웅! 소령님! ]
[ 들었지 대위? 다시 조준할 수 있도록 베르쿠트의 기동력으로 적을 봉쇄해! ]
"Да! Беркут. ШОУ Время!"
[ 설웅! 가교! ]
[ 또? 오늘 진짜 빡세네! ]
쇼타임을 선언한 베르쿠트가 루트를 향해 제압사격을 가하며 육박하는 것과 동시에
거의 추락에 가까운 급강하를 하는 설웅제의 왼팔에서 다시금 가교가 떨어져나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
적잖은 피해를 입어 모니터까지 부분적으로 나간 조종석 안에서 루트의 파일럿은
극한 상황에서도 공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기센 눈동자로 모니터를 살폈다.
이윽고 그녀가 오른쪽 아래에서 육박해오는 베르쿠트에 집중하자 루트의 오른팔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대위님! 에너지 반응 감지!"
"얼마든지 오라고 해! 플레어도 스모크도 없이 에어쇼가 되나?!"
"적! 빔 사격입니다!"
루트는 오른팔 손목과 장갑 사이가 열리자 응집된 빔덩어리를 무자비한 포수처럼
접근해오는 순백의 백조를 향해 마구 쏘아대었다.
"이봐. 여인에게 춤을 신청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잠깐! 대, 대위님! 무슨 생각을!"
"MSN이 사람한테 놀라면 쓰나!"
"꺄아아!"
말 그대로 광속으로 날아오는 빔덩어리를 오히려 중심축삼아 베르쿠트의 새하얀 동체가 화려한 배럴 롤을
선보이며 회피해내자 오히려 한계까지 몰린 MSN 베르쿠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한번만 더하면 기체 박살나겠습니다!"
"안 죽었으면 됐잖아! 사격!"
"치잇! 전 어디의 눈바람 같은 막돼먹은 전투기가 아니라고요!"
투덜투덜 대면서도 할 거 다하는 베르쿠트의 명령어가 기체 전체에 전달되자 다시금 RFRX II 베르쿠트는
연신 이온 펄스를 퍼부으며 설웅의 가교와 함께 루트의 주변을 전방위로 맴돌았다.
"설웅! 주포 전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나 자신에게!"
진심으로 기뻐하며 설웅은 그토록 좋아하는 주포를 마침내 적을 향해 펼칠 기회를 얻었다.
"기체 감속. 주포 전개 완료!"
하강하던 기체의 자세가 안정됨과 동시에 12.0m 구경의 거대한 주포의 끝이 루트를 향해 정조준 되었다.
[ 김 중위. 적의 이공간 방어장을 뚫으려면 두 대질량탄이 동시에 맞아야 한다. ]
"알겠습니다 소령님. 타이밍은 MSN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 당연하지! 나누크! 목표 적 루트! ]
"설웅! 목표!"
"나도 알아! 대탄 장전!"
[ 조준 완료! ]
"조준 완료!"
흑과 백의 묘한 대비를 이루는 두 기체의 포구가 공동의 적을 향해 정조준 되자
모니터의 적색 상자가 녹색으로 변하였다.
[ Огонь! ]
"발사!"
두 거인이 토해낸 무시무시한 위력의 대질량탄이 작은 태양처럼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루트의 조종석을 빛으로 가득히 물들였다.
곧이어 조종석 안은 붉은 비상등과 경고음으로 가득 차버렸다.
두 대질량탄의 화력이 이공간방어장의 허용한계를 넘어버린 것이었다.
"Ve…!"
순간 이때까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던 루트의 파일럿이 분노에 찬 거친 말 한마디를
채 다 내뱉기도 전에 조종석 주변이 물빛으로 반짝이며 그녀와 조종석 전체를 통째로 사라지게 하였다.
이윽고 1초도 지나기 전, 조종석이 있었던 빈 공간에
기계부품이 통째로 밀려들어오며 루트는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래, 제발…"
지휘차량 안에서 초조하게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예게네프는 순간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명중한다! 꽉 잡아라!"
"проклятие!"
발사된 두 발의 대질량탄이 공중에서 루트와 충돌하자 그곳을 폭심으로 온 사방이 거대한 충격파에 휩싸였다.
"아악!"
차량 안의 관제요원의 비명과 함께 온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을
예계네프도 느꼈지만 이 중년의 얼굴에는 도리어 웃음이 가득했다.
멀리 떨어진 차가 전복될 정도의 충격파라면 그건 곧 제대로 적을 박살냈다는 소리였다.
"베르쿠트! 이거 엄청난데!"
"적 루트 소멸! 기체 안정되었습니다!"
대질량탄이 발사되자마자 최대 속도로 이탈했지만 날아온 충격파에 의해
조종 불능 직전까지 몰린 베르쿠트는 간신히 허공에서 수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꺄아아!"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며 난데없이 발작을 일으키는 설웅에 놀란 김병장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웅!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그게… 다 이겨놓고 가교 부셔먹었어!"
"또?! 그게 얼마짜린데!"
웬일로 안 망가진다 싶더니 역시 뭐라도 자기 몸에 달린 건 하나 부셔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건 여전했다.
일주일 후. 러시아 영공. 대하항공 LOCK-ING 763편 일반석.
총총한 별들이 비춰지는 비행기 유리창에는 턱을 괴고 있는 김병장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주무시기 힘드신가요?"
"아, 예. 괜찮습니다. 음… 저기 혹시 따뜻한 우유 한잔 가능할까요?"
"예, 준비하겠습니다."
단아한 자태의 스튜어디스가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 김병장은 그대로 눈길을 옆 아래로 돌렸다.
"고로롱…"
그의 옆자리에는 정말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두 자매가
서로의 어깨와 머리를 배게 삼아 말 그대로 고이 잠들어 있었다.
러시아. 모스크바. 바간코프스코이 국립묘지.
"오랜만이다. 나 왔다. 세르게이."
회녹색 장교 정복 위에 회색 코트를 덧입고 입에는 반쯤 타들어간 시가를 꼬나문
베르길로프가 붉은 테두리가 장식된 모자를 벗으며 옛 전우의 묘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누크. 너도 오랜만이지?"
"예. 소령님."
"가지고 온 것 좀 줄래?"
"여기요."
대략 열흘 전쯤 설웅이 그랬듯 이번엔 베르길로프가 보드카가 담긴 컵 한잔을 묘비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그는 한잔을 더 따라 자신의 손에 들고 있었다.
"세르게이. 얼마 전에 그 녀석이 또 나타났어. 이번엔 우리가 이겼지."
묘비가 대답할리는 없지만, 베르길로프는 왠지 말이 통하는 느낌에 손에 든 보드카를
묘비를 향해 지켜들며 건배하는 시중을 했다.
"그리고 말이야. 이건 너한테는 안 좋은 소식일지도 모르겠는데…"
보드카 한잔을 쭉 들이킨 베르길로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술만으로 살근히 미소를 지었다.
"아냐. 다시 생각해보니 좋은 소식이겠다."
베르길로프는 주머니에서 시가 한대를 더 꺼내 입에 물고 있던 시가로 불을 붙여 묘비 앞에 올려놓았다.
"설웅한테 좋은 파일럿이 생겼더라고. 그러니 걱정 말고 푹 쉬어."
"허허… 이거 빨리 마무리해야 하는데. 내가 그걸 어디다 뒀더라?"
뚱뚱하고 후덕한 인상의 중년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노트북으로
이번 '테스트'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그 사진을 어디에 저장했지? 분명 지우진 않았을 텐데."
보고서에 쓸 사진을 찾기 위해 연신 터치패드를 두드리며 검색도 해보고
사진폴더도 이리저리 열어보던 중 예게네프는 갑자기 입술 사이로 실소를 터트렸다.
"이런! 내가 이런 사진도 찍었던가?!"
그는 뭐가 우스운지, 그 사진을 뷰어 프로그램으로 크게 확대하고서는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보드카 병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사진 속에는 모의전때 기절해 축 늘어진 설웅을 힘겹게 업어 나르는 김병장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계속>

<진짜 계속>


77 :
"경고! 적 접근!"
"너 진짜 개량된 건 맞냐?! 왜 이리 둔해!"
분명히 모든 면에서 개량되어진 'KFRX1 A1'이지만, 워낙에 루트가 늘 성능으로 압도하다보니
김병장은 도저히 피부로 체감을 못하며 엄한 설웅만 탓했다.
"닥치고 저거나 막아!"
"우이씨!"
적이 접근하자 견제를 위해 띄워놓은 가교가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착검한 글라디우스 하나 빼면 완전히 몸으로 때워야 하는 상황이 되 버린 것이었다.
"거리 200!"
"말이 200이지!"
엎드려 포 닿을 거리까지 육박한 루트가 왼팔을 높게 치켜들어 설웅제를 후려치려 했다.
"가드!"
엉겁결에 김병장은 막는다는 생각을 이상하게 말해버렸지만,
말이 어떻든지 설웅제는 오른팔을 90도로 굽힌 채 날아오는 빔소드를 글라디우스로 막아냈다.
"아저씨! 왼쪽!"
"이아아아!"
루트가 세련된 검사라면 이쪽은 저돌적인 전사였다. 루트가 오른팔로 설웅제를 재차 내려치려 했지만
타이밍 좋게 설웅제는 왼팔로 루트의 팔을 붙들 수가 있었다.
"잡았다!"
"쳇! 출력이 딸려! 넘어간다!"
잡았다고 좋아하는 김병장과 달리 설웅은 힘 앞에 무너지는 자신을 느끼며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그대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한 루트는 설웅제를 눈밭 위에 자빠트려버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봐!"
"아저씨 조심해! 단검이다!"
설웅의 주의와 동시에 모니터에 적색 박스가 루트의 오른손아귀에 고정되었고, 아니나 다를까.
루트가 쥐고 있는 칼자루의 기다란 빔날이 접혀들더니 칼자루 아래로 짧은 빔날이 대신 튀어나왔다.
"설웅! 가교로 어떻게 좀 해봐!"
"안 돼! 너무 늦어!"
[ 어려울 땐 부르세요~ 육군의 친구 공군! ]
"베르쿠트!"
위기의 순간, 링크를 타고 흘러들어온 쾌활한 소리와 동시에 루트의 등 뒤에서도 큼직한 섬광이 쾌활하게 터져올랐다.
"설웅! 고개 돌려!"
"자꾸 이래라 저래라야!"
충격으로 루트가 왼손에서 칼자루를 놓치자, 찰나의 순간 설웅제는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크읏!"
무언가에 화끈 데인 아픔을 느끼며 설웅은 자신의 왼쪽 귀를 감싸 쥐었다.
떨어진 칼이 머리 왼쪽을 스치며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자식! 생긴 건 꼭 골동품 갑옷 같은 게!"
완전히 감이 돌아온 김병장의 생트집 잡는 소리와 함께 설웅제는 있는 힘껏 양 팔로 루트를 밀쳐내자,
눈앞을 가리고 있던 거대한 푸른 갑옷덩어리가 사라지며 시야가 훤해졌다.
"저게 신형이구나."
합체한 채 돌아온 새하얀 베르쿠트는 이마에 박힌 금색 쌍두독수리 문장을 반짝이며
총구에 대검을 끼워놓은 드라구노프 형태의 76.2cm 이온 저격총을 든 채 하늘 위에 당당히 버티고 떠 있었다.
"베르쿠트. 이거 가지고는 택도 없는데?"
"원래 무기는 배치 순간 구식이잖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A급 입니다."
"칫, 첫 등장에 합체장면도 신경 안 쓰고 무기는 먹히지도 않고…"
"대위님. 나누크가 뭘 하려는 것 같습니다."
"왔구나."
베르길로프가 고개를 쳐들어 조종실 천장의 모니터를 쳐다보자
RFRX 이마의 루비별을 동토의 햇살에 반짝이며 나누크의 위압적인 얼굴도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자! 나누크!"
"Да!"
탄막사격이 잦아진 틈을 타 다시 한 번 하얀 거인이 가교를 앞세우고 설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경고! 14시 상방 적 비행체!"
"공군이 알아서 하겠지!"
[ 딩동댕~! ]
베르쿠트의 전면 모니터에 응집 사격 대형을 취하려는 세대의 비행체가 표적으로 고정되었다.
"사격!"
의묘제의 1.27m 대물 저격총에 비하면 훨씬 약하지만 그만큼 연사력이 좋은
76.2cm 이온 저격총이 하늘에 세 개의 빗살을 만들어냈다.
"전 목표 명중… 경고. 비행체 다수 증원!"
"아주 바퀴벌레 알집이 따로 없네."
"거리 80! 왼쪽!"
"막아!"
가교를 앞세우고 파고든 나누크를 루트가 오른손으로 옮겨 잡은 빔소드로 후려쳤지만
또 다시 가교 방패에 빛만 난반사될 뿐이었다.
"나누크! 공간파!"
"Да!"
나누크의 글라디우스가 공간파 진동을 일으키며 루트의 동체를 향해 날아드는 모습이
루트의 조종석 모니터에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제길! 빗나갔다!"
루트의 복부를 노린 일격은 베르길로프의 탄식과 함께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가볍게 날아오른 루트는 검을 잃어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나누크의 어깨를 짚으며 말 그대로 재주를 넘고 있었다.
"Проклятье!"
베르길로프가 욕설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자 후방모니터에 비추어진
루트의 거꾸로 선 두개의 적색 광학센서와 눈이 마주쳤다.
[ 베르길로프! ]
[ 소령! 엎드리십시오! ]
"KFRX 입니다!"
"나누크! 포복해!"
완전히 등이 빈 채 일격을 당하기 직전, 설웅제가 나누크의 정면으로 달려들며 뛰어오르자
나누크는 그 밑으로 파고들듯이 야구선수의 슬라이딩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저씨! 어금니 꽉 깨물어! 충돌!"
"읍!"
가교를 회수한 왼팔을 가슴에 붙인 채 달려든 설웅제가 방패로 루트를 쳐내자,
동토의 대기가 다시금 찢어지며 두 거체가 눈밭 위에 마구 나뒹굴었다.
"아야야… 어…떠냐!"
"넌 지금 루트를 잡는 거냐 날 잡는 거냐…"
하지만 공격받은 루트보다 김병장이 데미지를 더 입었는지 정작 루트는
툭툭 털고 일어나듯 벌떡 일어나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었다.
"좋아! 지금부턴 나하고 한곡 추자고!"
주변에서는 루트의 무선유도 비행체들이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틈만 나면 빔을 쏘아대고 있었지만
베르쿠트는 러시안 나이츠의 곡예비행처럼 100m 크기의 백조 같은 미끈한 동체를 아름답게 움직였다.
"베르쿠트! 적의 어깨를 조준해!"
"조준 완료!"
"사격!"
그 와중에서도 찰나의 틈에 베르쿠트는 루트를 노리고 사격을 퍼붓자,
말 그대로 루트는 공중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듯 이리저리 돌며 날아오는 이온 덩어리들을 피해버렸다.
"경고! 적이 비행체를 결집합니다!"
"좋잖아? 적도 신났는데!"
"농담이 나오십니까? 일제사격입니다!"
베르쿠트의 말대로 루트는 공중에서 자체를 고쳐 잡더니 비행체들을 자신의 등 뒤로 모아 사격을 개시했다.
"적 접근!"
"프롬에서도 이런 춤은 못 춰봤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일제사격으로 베르쿠트의 움직임을 봉쇄한 채 육박한 루트의 빔소드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움직임을 소화해내던 베르쿠트의 드라구노프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크읏! 역시 출력에서는 밀리네?"
"대위님! 물러나십…!"
순간, 후방석에 앉아있던 베르쿠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르쿠트! 왜 그래?!"
"무, 물러나십시오! 이건!"
"치잇! 알았다고!"
리트비야크는 루트를 떨쳐내기 위해 오른다리로 루트의 복부를 찍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루트의 왼팔이 베르쿠트가 움직이기도 전에 무릎이 날아올 곳으로 손바닥을 펼치는 것이었다.
"잡혔어?! 크읏!"
순식간에 모니터는 또 다시 땅과 하늘이 바뀌어 버렸다.
한쪽 다리가 잡힌 베르쿠트를 루트가 냅다 집어던진 것이었다.
"우웃~!"
리트비야크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격렬한 기동 속에서도 용케 기체의 균형을 다시 잡았다.
"베르쿠트! 왜 그래? 움직임이 갑자기 느려졌어!"
"대위님. 움직임이 느려진 게 아닙니다. 적이 먼저…"
[ 대위! 피해! ]
"웃!"
응집된 빔이 베르쿠트를 노리고 날아들자 본능에 가까운 조작으로 베르쿠트는 그 사선을 피했지만,
회피한 자리를 노리고 일제 사격된 빔이 장대비처럼 날아들었다.
[ 안 피하고 뭐하는 거야! ]
위기의 순간, 지상에서 대응한다는 원칙을 깬 나누크가 베르쿠트의 앞을 가로막으며 가교로 일제사격을 막아내었다.
"나누크! 어떻게 된 건가?"
"시험 중인 기체라 에러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베르쿠트와 링크 중… 경고! 프로그램에 허용되지 않은 침입입니다!"
"이런! 해킹인가!"
"프로그램 보안을 올리겠습니다."
[ 가라 가교! ]
공중에서 심상찮은 움직임이 보이자, 마침내 설웅제도 가교를 먼저 날려 앞세운 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여기는 설웅제! 나누크! 무슨 일이야?!"
[ 설웅! 적의 해킹 공격이야. 조심해! ]
"설웅. 해킹이라면… 설마 그!"
"치잇. 역시 허용되지 않은 무언가가… 걱정 마 아저씨.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설웅! 적이 움직인다!"
베르쿠트와 나누크의 움직임이 둔해진 틈을 타서 루트는 고도로 급상승시키며
자신의 발아래에 비행체들을 포진시켰다.
"가교! 목표 적 비행체! 악몽의 정체가 이거였나…"
왼쪽 송곳니로 붉게 칠해진 입술을 꼭 깨물면서도 설웅이 산출해낸
최적 공격 경로를 따라 가교가 적 비행체를 노리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잠깐. 뭐야 저건!"
"공격 경로를 파악하고 피해?!"
루트의 비행체는 가교가 빔을 쏘려는 경로를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ㄷ자로 접혀진
가교의 중앙부에서 빔이 충전되어 발사되기도 전에 그 진로에서 일지감치 흩어지는 것이었다.
"베르쿠트! 봤지?"
그제야 베르쿠트는 금빛 도는 흑발을 흔들며 정신을 차리는 모양이었다.
"예. 적은 해킹으로 아군의 기동 경로를 파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막을 방법은?"
"그게… 경고!"
"알았어! 피하면 되잖아!"
발아래의 FRX들을 향해 루트의 비행체들이 광범위한 영역에 소나기 같은 빔을 뿌려대었다.
"하나, 둘, 셋, 넷… 20개쯤 되는 건가?"
[ 이런. 탄적재만 했어도 강철의 오르간으로 진작 날려버렸을텐데 말이야. ]
나누크의 등 뒤에 달린 2MS19 FRX의 텅 빈 발사관들을 생각하는 베르길로프의
무미건조한 탄식소리가 통신을 타고 흘렀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안전지대로 대피한 지휘차량 안에서 예게네프는 두툼한 턱을 붙잡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통신장교. 아직도 대대와 통신은 불통입니까?"
"예. 기술부장님."
"흠… 만약 통신이 된다면 AFRX의 전자전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저기, 예게네프 기술부장?"
"뭡니까. 미코야노비치 수석?"
날카로운 안경중년이 스크린 속 설웅제의 모니터링 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 생각에는 설웅제라면 이 해킹 공격에서 자유로울 거라 생각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직접 만들고도 모르십니까? 설웅제는 트윈 MSN. 말하자면 듀얼 코어잖습니까."
꽤나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예게네프는 오히려 그 말에 무릎을 탁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그렇군요! 그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 여기는 예게네프. KFRX I 설웅제 응답하라. ]
"설웅제 수신. 무슨 일이십니까?"
[ 설웅. 잘 들어라. 지금 적의 해킹공격으로 공격루트가 파악된다는 건 잘 알거다. ]
"당연한 소리 하시려고 부른 건 아니시겠죠?"
[ 당연하지. 지금 너의 트윈 MSN으로서의 능력이 필요하다. 이 상황을 뒤집을 건 너 밖에 없어! ]
예게네프는 오직 '트윈 MSN'에 대해서만 말했지만, 순식간에 눈치를 챈 설웅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 왜 그러나 설웅? ]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상."
고민하며 말을 흐린 설웅은 프로그램이 복잡해졌다.
'아저씨한테 맡겨도 괜찮을까?'
'언니, 지금이 바로 믿어줄 때잖아.'
'아무리 그래도 못미더워.'
'그럼 차선책을 찾아보던지.'
사람으로 치면 생각으로 혼자 놀기를 하던 설웅이 마침내 결과 값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 나누크! 베르쿠트! 여기는 설웅제! 적을 직접 노리겠습니다. 엄호하십시오! ]
"설웅. 어떻게 하려고?"
"아저씨. 잘 들어. 지금부터 난 방화에 집중할거고 나머지는 화이트가 맡아서 할 거야.
그럼 조종은 순전히 아저씨가 집중해야 해."
"잠깐! 내가?!"
"아저씨가 약 먹은 건지 모르겠지만 제법 하잖아? 그러니까 좀 더 힘내봐."
"…"
"이 양반 보게나? 언제는 안 믿어준다고 난리더니 이번엔 믿어준다고 해도 싫어?"
"알았어. 그나저나 너 이중인격, 아니 트윈 MSN인게 이럴 땐 좋다?"
"아저씨는 여기서 살아남으면 내손에 죽을 줄 알아."
으름장을 놓으며 설웅은 도끼눈을 흘기며 주먹을 쳐들어보였다.
"이야, 그 소리 들으니까 나 긴장 타는데."
"자꾸 까불래?"
[ 설웅. 나 베르길로프인데. 거 작전 세웠으면 부부싸움은 있다가 하면 안 될까? ]
"소령! 누가 부부입니까!"
"베르길로프 너도 세트로 죽일 거야! 아무튼 작전 개시!"
설웅의 선언과 함께 조종석 모니터에는 기체 일부 기능의 사용불능을 알리는 빨간 표시가 여기저기 떠올랐다.
"?!"
동시에 루트의 조종석에서는 뾰족귀를 가진 금발묘령의 아가씨는 눈을 치켜뜨며 모니터를 주시했다.
세대의 FRX의 예상 경로를 표시하던 마크 중 설웅제의 마크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소령님! 설웅제가 돌격합니다!"
나누크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RFRX 나누크 옆을 KFRX 설웅제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며 수직으로 상승했다.
"아저씨. 많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냥 적하고 부딪혀버려!"
"말시키지 마! 나 지금 운전하잖아!"
운전경력, 아니 조종경력 근 1년의 김병장은 마치 첫 단독주행에 바짝 쫄은 초보운전자 같았다.
설웅이 완전히 프로그램 방화를 실행중이라 기체의 조종 연산을
화이트의 프로그램이 맡은 상태지만 그것으로는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됐어 베르쿠트! 적도 당황했어!"
"설웅제. 루트와 충돌합니다!"
모니터에 루트와 설웅제 사이의 간격과 속도 등을 나타내는 데이터가 초시계보다도
빠르게 줄어들더니 마침내 그 둘이 적색 테두리로 둘러쳐졌다.
"받아라!"
김병장이 왼팔을 크게 휘두르는 생각을 하자 가교방패를 낀 왼팔이 크게 움직이며 루트를 후려쳐냈다.
"큿! 움직임이 너무 커!"
"미세 필터링을 내가 못하니까 그래! 침착해 아저씨!"
하지만 설웅제의 움직임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은
루트는 빔소드의 출력을 올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설웅! 막아!"
"바쁘니까 니가 좀 하세요!"
"아차!"
늘 하던 대로 하려던 김병장은 퍼뜩 제정신을 차리며 거대한 가교로 기체를 가렸다.
"큿!"
선팅이 된 헬멧 바이저가 번쩍거리는 빛을 가려주며 비추는 가교 너머로 빠끔히 보이는
루트의 에머랄드색 렌즈에 김병장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아저씨! 정신 차리고 계속 움직여!"
"칫! 아래!"
서로 엉켜있는 순간 루트는 왼쪽 무릎으로 설웅제를 걷어차려 했지만 거의 동시에 설웅제가
오른쪽 무릎을 세우는 바람에 그 공격은 막히며 두 기체의 중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저리!"
두 기체의 중심이 무너지며 설웅제가 위에서 덮쳐 내리는 자세가 되자 김병장은
그 힘을 이용해 방패로 루트를 손쉽게 밀어 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싸움으로 한쪽 검을 잃은 루트는 순간 안아달라는 것처럼
양팔을 벌리는 자세로 완전히 기체 전체를 무방비로 노출하고 말았다.
"꺼져!"
[ 글라디우스. 공간파 충전 ]
모니터에 글라디우스의 상태창이 확대되며 공간파 충전율이 표시되자
오른팔에 착검된 검의 몸체가 공간파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끝이다!"
설웅제의 거대한 팔이 제대로 한대 먹이려는 싸움꾼처럼 있는 대로 뒤로 어깨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음속을 가볍게 넘어 충격파를 만들어내며 루트의 가슴 한복판에 내리꽂혔다.
"…뭐지 이건?!"
"프로그램 정상화. 경고. 적 반중력 방어장 가동!"
상황이 다급해지자 프로그램 방화를 종료한 설중이 다시 기체를 정상화시키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칫! 이쪽 공간파보다 저쪽 출력이 더 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설웅제의 칼끝은 금세라도 루트의 가슴 장갑을 꿰뚫을 것처럼
그 위에 고정된 채 더 이상 들어가지를 못하고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때, 루트의 왼쪽 가슴 위로 한줄기 푸른빛이 솟구쳐 올라왔다.
"읏! 근접병기인가?!"
"아냐! 저것 봐!"
[ 오, 이제 좀 먹히는 건가 베르쿠트? ]
[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대위님. ]
설웅제와의 전투로 루트의 견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베르쿠트의 76.2cm 저격총에서 발사된
이온펄스가 루트의 등 뒤에 작렬했다. 그리고 베르쿠트의 말 대로 몹시 운 좋게도
비행체를 사출하던 발사셀의 이음새가 피탄 된 덕에 그대로 이온 펄스가 루트의 가슴을 꿰뚫어버린 것이었다.
"대위님. 비행체가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멈춘 정도가 아니라 아주 추락하는데?"
리트비야크의 말대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비행체가 마치 약 먹은 날파리떼처럼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관통된 곳에 비행체를 총괄하는 유도장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쳇, 저런 운은 이런데 쓰지 말고 복권 사는데 썼어야 하는데."
"예, 예. 정말 군인정신의 귀감이십니다."
[ 대위. 감탄만 하지 말고 빨리 설웅제를 지원하라. ]
"들었지 베르쿠트? 일단 이탈해서 전장을 넓게 가지고 지원한다."
"Да!"
적의 봉쇄에서 풀린 베르쿠트가 나누크에게서 떨어지며 푸르고도 시린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모니터로 지켜보며 베르길로프는 마치 공중에서 배영을 즐기듯 기체를 수평으로 만들며 외쳤다.
"나누크! 주포 전개!"
"Да!"
나누크가 명령을 실행하자, 등 뒤에 달려있던 나누크의 주포가 허리에 장착되며
길이 100m, 구경 12.5m의 거대한 주포로 전개되었다.
"목표. 적 루트!"
"조준 완료!
"설웅. 김 중위. 떨어져라!"
[ OK! 아저씨! 이탈한다! ]
"Огонь!"
베르길로프의 강철 같은 명령과 함께 포신이 빛으로 차오르며 하늘 위의 루트를 향해 대질량탄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설웅은 루트에게서 급속히 이탈하며 대질량탄이 루트와 충돌하는 순간을 데이터로 모니터에 표시하였다.
"3, 2, 1. 명중!"
"해치웠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설웅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는 것처럼 루트는 그 자리에 더 이상의 상처 없이 버티고 서 있었다.
"적 건재! 이공간방어장 가동 확인!"
"저게 말로만 듣던… 정말 놀라워."
FRX의 무기체계중 최고수준의 화력을 자랑하는 대질량탄조차
완벽하게 막아버리는 이공간방어장을 보며 리트비야크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진짜 아까건 운이 좋았네."
[ 베르쿠트! 여기는 나누크! 들립니까? ]
"예, 베르길로프 소령.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 어떡하긴 어떡해. 한대 더 때리면 되지. ]
"…예?"
곰하고 친하게 지내다보니 베르길로프도 곰이 됐는가 싶은 미련한 소리에 리트비야크는
헬멧 속에서 왼쪽 눈썹을 까닥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의문은 이어진 설웅제의 통신으로 가로막히었다.
[ 그래. 그리고 한발이 안 되면 두발을 동시에 먹여주자고. 나누크! 이쪽은 언제나 OK! ]
[ 알았어 설웅! 소령님! ]
[ 들었지 대위? 다시 조준할 수 있도록 베르쿠트의 기동력으로 적을 봉쇄해! ]
"Да! Беркут. ШОУ Время!"
[ 설웅! 가교! ]
[ 또? 오늘 진짜 빡세네! ]
쇼타임을 선언한 베르쿠트가 루트를 향해 제압사격을 가하며 육박하는 것과 동시에
거의 추락에 가까운 급강하를 하는 설웅제의 왼팔에서 다시금 가교가 떨어져나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
적잖은 피해를 입어 모니터까지 부분적으로 나간 조종석 안에서 루트의 파일럿은
극한 상황에서도 공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기센 눈동자로 모니터를 살폈다.
이윽고 그녀가 오른쪽 아래에서 육박해오는 베르쿠트에 집중하자 루트의 오른팔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대위님! 에너지 반응 감지!"
"얼마든지 오라고 해! 플레어도 스모크도 없이 에어쇼가 되나?!"
"적! 빔 사격입니다!"
루트는 오른팔 손목과 장갑 사이가 열리자 응집된 빔덩어리를 무자비한 포수처럼
접근해오는 순백의 백조를 향해 마구 쏘아대었다.
"이봐. 여인에게 춤을 신청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잠깐! 대, 대위님! 무슨 생각을!"
"MSN이 사람한테 놀라면 쓰나!"
"꺄아아!"
말 그대로 광속으로 날아오는 빔덩어리를 오히려 중심축삼아 베르쿠트의 새하얀 동체가 화려한 배럴 롤을
선보이며 회피해내자 오히려 한계까지 몰린 MSN 베르쿠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한번만 더하면 기체 박살나겠습니다!"
"안 죽었으면 됐잖아! 사격!"
"치잇! 전 어디의 눈바람 같은 막돼먹은 전투기가 아니라고요!"
투덜투덜 대면서도 할 거 다하는 베르쿠트의 명령어가 기체 전체에 전달되자 다시금 RFRX II 베르쿠트는
연신 이온 펄스를 퍼부으며 설웅의 가교와 함께 루트의 주변을 전방위로 맴돌았다.
"설웅! 주포 전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나 자신에게!"
진심으로 기뻐하며 설웅은 그토록 좋아하는 주포를 마침내 적을 향해 펼칠 기회를 얻었다.
"기체 감속. 주포 전개 완료!"
하강하던 기체의 자세가 안정됨과 동시에 12.0m 구경의 거대한 주포의 끝이 루트를 향해 정조준 되었다.
[ 김 중위. 적의 이공간 방어장을 뚫으려면 두 대질량탄이 동시에 맞아야 한다. ]
"알겠습니다 소령님. 타이밍은 MSN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 당연하지! 나누크! 목표 적 루트! ]
"설웅! 목표!"
"나도 알아! 대탄 장전!"
[ 조준 완료! ]
"조준 완료!"
흑과 백의 묘한 대비를 이루는 두 기체의 포구가 공동의 적을 향해 정조준 되자
모니터의 적색 상자가 녹색으로 변하였다.
[ Огонь! ]
"발사!"
두 거인이 토해낸 무시무시한 위력의 대질량탄이 작은 태양처럼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루트의 조종석을 빛으로 가득히 물들였다.
곧이어 조종석 안은 붉은 비상등과 경고음으로 가득 차버렸다.
두 대질량탄의 화력이 이공간방어장의 허용한계를 넘어버린 것이었다.
"Ve…!"
순간 이때까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던 루트의 파일럿이 분노에 찬 거친 말 한마디를
채 다 내뱉기도 전에 조종석 주변이 물빛으로 반짝이며 그녀와 조종석 전체를 통째로 사라지게 하였다.
이윽고 1초도 지나기 전, 조종석이 있었던 빈 공간에
기계부품이 통째로 밀려들어오며 루트는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래, 제발…"
지휘차량 안에서 초조하게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예게네프는 순간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명중한다! 꽉 잡아라!"
"проклятие!"
발사된 두 발의 대질량탄이 공중에서 루트와 충돌하자 그곳을 폭심으로 온 사방이 거대한 충격파에 휩싸였다.
"아악!"
차량 안의 관제요원의 비명과 함께 온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을
예계네프도 느꼈지만 이 중년의 얼굴에는 도리어 웃음이 가득했다.
멀리 떨어진 차가 전복될 정도의 충격파라면 그건 곧 제대로 적을 박살냈다는 소리였다.
"베르쿠트! 이거 엄청난데!"
"적 루트 소멸! 기체 안정되었습니다!"
대질량탄이 발사되자마자 최대 속도로 이탈했지만 날아온 충격파에 의해
조종 불능 직전까지 몰린 베르쿠트는 간신히 허공에서 수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꺄아아!"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며 난데없이 발작을 일으키는 설웅에 놀란 김병장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웅!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그게… 다 이겨놓고 가교 부셔먹었어!"
"또?! 그게 얼마짜린데!"
웬일로 안 망가진다 싶더니 역시 뭐라도 자기 몸에 달린 건 하나 부셔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건 여전했다.
일주일 후. 러시아 영공. 대하항공 LOCK-ING 763편 일반석.
총총한 별들이 비춰지는 비행기 유리창에는 턱을 괴고 있는 김병장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주무시기 힘드신가요?"
"아, 예. 괜찮습니다. 음… 저기 혹시 따뜻한 우유 한잔 가능할까요?"
"예, 준비하겠습니다."
단아한 자태의 스튜어디스가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 김병장은 그대로 눈길을 옆 아래로 돌렸다.
"고로롱…"
그의 옆자리에는 정말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두 자매가
서로의 어깨와 머리를 배게 삼아 말 그대로 고이 잠들어 있었다.
러시아. 모스크바. 바간코프스코이 국립묘지.
"오랜만이다. 나 왔다. 세르게이."
회녹색 장교 정복 위에 회색 코트를 덧입고 입에는 반쯤 타들어간 시가를 꼬나문
베르길로프가 붉은 테두리가 장식된 모자를 벗으며 옛 전우의 묘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누크. 너도 오랜만이지?"
"예. 소령님."
"가지고 온 것 좀 줄래?"
"여기요."
대략 열흘 전쯤 설웅이 그랬듯 이번엔 베르길로프가 보드카가 담긴 컵 한잔을 묘비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그는 한잔을 더 따라 자신의 손에 들고 있었다.
"세르게이. 얼마 전에 그 녀석이 또 나타났어. 이번엔 우리가 이겼지."
묘비가 대답할리는 없지만, 베르길로프는 왠지 말이 통하는 느낌에 손에 든 보드카를
묘비를 향해 지켜들며 건배하는 시중을 했다.
"그리고 말이야. 이건 너한테는 안 좋은 소식일지도 모르겠는데…"
보드카 한잔을 쭉 들이킨 베르길로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술만으로 살근히 미소를 지었다.
"아냐. 다시 생각해보니 좋은 소식이겠다."
베르길로프는 주머니에서 시가 한대를 더 꺼내 입에 물고 있던 시가로 불을 붙여 묘비 앞에 올려놓았다.
"설웅한테 좋은 파일럿이 생겼더라고. 그러니 걱정 말고 푹 쉬어."
"허허… 이거 빨리 마무리해야 하는데. 내가 그걸 어디다 뒀더라?"
뚱뚱하고 후덕한 인상의 중년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노트북으로
이번 '테스트'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그 사진을 어디에 저장했지? 분명 지우진 않았을 텐데."
보고서에 쓸 사진을 찾기 위해 연신 터치패드를 두드리며 검색도 해보고
사진폴더도 이리저리 열어보던 중 예게네프는 갑자기 입술 사이로 실소를 터트렸다.
"이런! 내가 이런 사진도 찍었던가?!"
그는 뭐가 우스운지, 그 사진을 뷰어 프로그램으로 크게 확대하고서는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보드카 병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사진 속에는 모의전때 기절해 축 늘어진 설웅을 힘겹게 업어 나르는 김병장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계속>

"삼춘. 호야 계속 출연 안 시켜 주면 울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진짜 계속>

"드, 드디어 이 편이 끝났어…" O>-<
진지한거 하나 끝냈으니 이제 다시 개그다.(…)
진지한거 하나 끝냈으니 이제 다시 개그다.(…)

# by | 2009/11/09 00:13 | 크로와상 월드 | 트랙백 | 핑백(1)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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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데 방해된다고 조종사 던져버리는 그녀석입니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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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의 정체는....엘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