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3일
자주국방 KFRX : 75
<링크 - 이전 화> 자주국방 KFRX : 74 화
75 :
그날 깊은 밤. RFRX 소대 숙소.
“으으으…"
2층 침대가 덩그러이 놓인 방 안에서 홀로 잠을 자고 있는 나누크는 담요를 꼭 끌어안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마치 악몽을 꾸는 사람 같은 표정인 그녀의 프로그램 속 세상은
도리어 들꽃이 만발한 푸른 들판이었다. 하지만.
“소령님? 소령님! 어디 계세요!”
문득 드넓은 벌판에 홀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누크는 꿈속에서 녹색의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들판을 온통 휘둘러보며 자신의 보호자를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온 사방에는 스치는 바람소리뿐이었다.
그 순간, 스치는 바람소리가 광풍으로 변하며 그녀의 백발단발을 마구 헤집었다.
“어? 꺄아아!”
등 뒤에서 스산한 기운을 느낀 나누크는 자신을 덮쳐 내리는 검은 그림자에 놀라며 잠에서 깨었다.
또 다시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가 창문을 덜그덕 덜그덕 두드리는 음산한 밤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북극곰은 황급히 자리 옆을 손으로 마구 짚어보았지만 꿈속에서 애타게 찾던,
언제나처럼 팔베개 하나는 해주셨을 소령님은 현실에서도 옆에 없었다.
“아! 아직 복귀 안하셨지!”
RFRX-II ‘Беркут’의 도착이 하루 지연됨에 따라, 덩달아 소령님도 오늘은 상급부대에서
묵으신다는 것을 떠올린 나누크는 아랫입술께 까지 담요를 꼭 붙든 두 손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하나도 안 무섭다. 하나도 안 무섭다. 하나도 안 무섭…”
그리고 잠시 뒤.
“으아아아아아아앙~”
“Чрезвычайная!”
“Чрезвычайная!”
“Чрезвычай…ная?”
갑자기 복도에서 애처로운 소녀의 비명소리에 졸지에 잠만 잘 자고 있던 기간부대와 경계 부대는
전투준비태세라도 울린 줄 알고 화들짝 깨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나누크는 자신이 부대 전체를 뒤집어 놓은 지도 모르고 그대로 설웅의 숙소로 냅다 달렸다.
“설우우우우웅~”
“뭐? 뭐야?!”
언제나 삐거덕거리던 낡은 문이 그 소리를 낼 새도 없이 급하게 열렸고,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나누크는 어둠 속의 사람 형상의 목에 착 달라붙었다.
“어엉~ 나누크 혼자 자기 무서워! 이상한 꿈 꿨단 말야!”
“커헉!”
뼈 꺾이는 소리와 함께 한바탕 벌어진 어둠속의 소란은
일어난 화이트가 벽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가관이네.”
“야 나누크. 나 여기 있거든?”
“응?”
양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누크는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화이트는 평소와 다름없는 반쯤 졸린 눈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설웅은 이층 침대에서 상반신을 거꾸로 한 채 1층 침대에서 질질 짜고 있는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꽉 조인 양 팔 안에는…
“커, 헉! 나, 나누크 소령님도 힘 세십니… 큵!”
아닌 밤중의 홍두깨를 당한 김병장이 뒷목이 꺾인 채
척수에 온 충격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품 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뭐야. 겨우 자다가 무섭다고 온 거야?”
“응, 나 되게 무서웠다고.”
“아이고 목이야…”
“이런, 호야도 이젠 혼자서 잘 자는데.”
상황종료된 방 안. 추리닝 차림의 셋에게 둘러싸인 나누크는
아직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간간히 코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었다.
“쯥.”
그림이라면 페인트 툴에서 채색되기 전의 자신의 외모와 똑같은 나누크의
애처로운 모습에 설웅은 입맛을 다시며 새집지은 머리를 긁적였다.
“할 수 없지. 여기서 자.”
“에헷~ 고마워! 역시 설웅은 날 알아준다니까!"
“알아주는 게 아니고 동정해 주는 거다.”
엉덩이에 곰 가죽털이라도 덮였을, 금세 울다가 금세 잘 웃는 나누크는
설웅만 바라보며 설웅이 뭐라 하건 생글거리기만 했고,
그 모습을 보며 화이트는 그 사이에 한대 다 핀 담뱃재를 빈 깡통에 털고 있었다.
“자, 그럼 됐지? 불 끈다. 자자고.”
“잠깐 화이트. 나 파스 좀 바르고.”
다른 장르에서는 엄한 쪽으로 자다가 여캐릭터들이 알아서 덮쳐주는게 남주인공이라지만
여기선 다른 의미로 덮쳐진 김병장은 이젠 필수품이 된 스프레이 파스를 목 뒤에 뿌리고 앉아 있었다.
“자, 그럼 진짜 불 끈다?”
“히힛! 난 설웅 옆자리~”
“어 그래. 근데 난 너의 소령님이 아니니까 자다가 더듬으면 죽인다.”
갑자기 무슨 정규군 기동훈련장이 아니라 단체로 수학여행 온 여학교 유스호스텔
같은 분위기가 된 방에는 또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김병장은 잠들 수가 없었다.
“…저기. 아가씨들?”
“아저씨는 또 뭐가 문젠데?”
머리 위 천장, 즉 2층 침대의 밑바닥 뼈대를 바라보며 김병장은 누운 채 질려있었다.
“저기 나랑 자리 좀 바꿔주면 안 돼? 그쪽 침대 가라앉으려고 하거든?”
“여자 셋이 올라갔다고 무너질 리가.”
“니들 MSN이거든요? 체중 1.5배 보정이시거든요?”
“이게 여자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신소리 닥치고 잠이나 퍼 자라고.”
“제바알… 자다가 여자 셋의 체중에 깔려죽었다는 소린 듣고 싶진 않다고.”
“왜. 영광이시지.”
김병장의 애원에도 설웅은 무심하게 나왔고, 나누크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으니,
이렇게 되면 덤터기 쓸 MSN은 한명밖에 없었다.
“끄응. 언니보다 짬 안 되는 내가 밑에서 자야지 뭐.”
아줌마 자리에서 겟업하시는 소리를 내며 화이트가 천천히 침낭을 걷고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이 김병장. 옆으로 좀 가봐. 자리 좀 만들라구.”
“제발 남자 취급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사람 취급이라도 좀 해주라 이것들아…”
어김없이 전날 쌓인 눈보라가 대지를 얼린 채 반짝이는 시베리아의 정오.
“СПАМ~!”
점심시간. 김병장이 가져온 스팸과 고추참치 통조림에 나누크는 쾌재를 부르며 누구보다 기뻐했다.
“응? 나누크 소령님도 스팸 좋아하십니까?”
“왜? 러시아는 스팸이 없을까봐?”
그냥 좋다고 바보처럼 생글거리는 나누크 옆에서 설웅이 그냥 습관적으로 핀잔을 주자,
김병장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뭐가 어때서 곰탱아! 물어보는 것도 안 되냐?”
“흥! 그러니까 무식하단 소릴 듣지!”
“자자, 어제 화해하고 오늘 또 싸우기야? 그만들 하고 밥 먹자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막대한 대 소련 원조물자엔 식료품도 물론 있었는데,
그 중에 두 가지가 바로 스팸과 콜라. 즉 짬밥에 스팸 곁들여 먹은 전통은 소련군이 한국군보다 훨씬 먼저.’
라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생략한 화이트는 먼저 숟가락을 들어
감자죽에 넣은 빵조각을 휘휘 돌린 뒤 한 숟가락 떠올렸다.
차고 넘치도록 떠올려진 밀가루와 전분덩어리가 먹음직스럽게 끈적이며 숟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갑자기 죽 위에 떠 있던 빵조각들이 진동모드의 휴대폰처럼 빠르게 떨리기 시작했다.
“Что?!”
“Что случилось!”
“Смотреть!”
식당 안의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말에 의해 웅성거리며 창밖을 쳐다보자, 하얀 설원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유리창이 깨질 것 같은 굉음과 진동이 막사 전체를 휘둘렀다.
“뭐야! 습격인가!”
굳이 김병장이 홀로 한국말로 너스레를 안 떨어줘도 화이트 빼고 다들 난리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아, 한사람 더 있었다. 누군고 하니 저쪽 식탁에서 혼자 식사중인 예게네프였다.
“왔구먼. 요란하시기도 해라.”
같은 시각. 훈련장 상공.
조금 전 소동의 주범. 전장 50m가 넘는 거대한, 그리고 아름다운 곡선과 각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순백색 초음속 폭격기가 다시 고도를 높여 선회에 들어가자,
그 옆으로 3대의 전투기가 호위처럼 따라붙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단일 기종으로 이루어진 편대가 아니라
마치 에어쇼의 시범비행 같은 각양각색의 전투기였지만 말이다.
[ 무슨 짓인가! 리트비야크 대위! ]
Ту-160 FRX 머리 위에서 비행중인 FRX Беркут 의 조종석 안에 앉은 여성 파일럿의
헬멧 스피커에선 깐깐한 중년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저기에 한국군 FRX 부대도 있다고 하기에 Беркут한테 인사 좀 하라고 했습니다.”
당돌한 캐릭터와 대립되는 깐깐한 인간이라면 너무 뻔 한 인물 배치였다.
더더욱 그 인물이 큼지막한 네모 안경에 비쩍 마른 중년인데다가,
연합설계국 수석기술자란 거창한 직함까지 달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 남자는 식상한 패턴에 완벽히 부합했다.
아무튼 이 사내는 뒤쳐져 오는 AN-22 수송기 안에서
휴대용 공간파 통신기로 생긴 것 답게 신경질적으로 왕왕거렸다.
[ 그게 인사인가?! 그러다 저 CCCP의 유물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아음속이었습니다. 별일 없잖습니까.”
[ 대위! 인민의 혈세로 만든 FRX가 장난감인줄 아나! 대체 국방부는 자네 같은 사람을! ]
더 이상 입씨름해봤자 피곤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리트비야크 대위는
헬멧과 연결된 마스크의 결합부를 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베르쿠트?”
“예 마스터…가 아니라 대위님.”
무언가 자신의 이름에서 정체성의 혼란이 왔는지 호칭을 실수한 뒷좌석의 MSN을 향해
리트비야크는 날 세운 손으로 허공의 무언가를 자르듯 흔들었다. 이윽고.
“윽! 그렇다고 통신을 끊어? 대위!”
성질이 뻗친 안경중년의 목울대에 힘이 솟는 걸 보며 옆자리의 베르길로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군도 참 괴짜를 뽑았군요.”
“소령. 보면 알겠지만 아주 미치겠습니다. 콱 옛날 같으면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도 시원찮을…”
“뻬레스뜨로이까가 언젠데 아직도 그런 소릴 하십니까.”
예게네프보다도 훨씬 젊으면서 훨씬 옛날 소리하는 이 사람에게 베르길로프는 한 번 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와아…”
막사 밖. 그 자신 역시 꿀릴 것 없는 3조 7천억\+VAT면제 탱크변신합체로봇을
모는 김병장은 하늘을 보며 솔직한 감탄사를 연발했다.
확실히 거대한 TU-160과 3대의 전투기가 편대를 이루어 막사 저편
간이 활주로로 날아가는 모습은 남자라면 누구나 가슴 두근거릴만한 장관이었다.
그것도 전투기의 엘프로 불리는 수호이와 미그라면 더더욱 말이다.
“대위님. 활주로가 너무 짧습니다.”
“그럼 어떡할까? 다리만 빼서 착륙할까?”
“대위님. 그건 스타스크림… USFRX 랩터도 안하는 짓입니다.”
그랬다가는 진짜 표절의 끝을 잡는다는 걸 잘 아는 금빛 도는 검정머리의 장발소녀는 딱 잘라 반대했다.
“할 수 없지. FRX로 변형해서 착륙한다. 이렇게 된 거
멀리 가지 말고 격납고 근처에 착륙하자고. 적절한 자리 좀 봐둬.”
“예. 대위님. …음?”
센서로 지상을 확인하던 베르쿠트는 스크린 하나를 확대했다.
그 스크린 속에는 막사 주변에서 비행중인 편대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한 군인이 있었다.
“대위님.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뭔데?”
베르쿠트가 리트비야크 옆에 작은 창을 띄우자 독수리눈의 그녀는 슬쩍 보는 것만으로
대번에 그 장면을 파악하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봐, 베르쿠트.”
“예.”
“다른 기체들은 격납고 쪽으로 보내. 그리고 지금 본체 조종은 나에게 맡겨.”
“알겠습니다.”
“좋아. 팬서비스라도 해줄까?”
편대의 선두를 날고 있던 베르쿠트의 백합꽃이 그려진 기수가 홀로 방향을 틀어
편대를 이탈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수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어? 뭐하는 거지?”
시리도록 푸른 하늘 속으로 사라진 검정색 전투기를 조금이라도 쫒기 위해 김병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작은 검은 점이 점점 급속도로 커져오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
분명히 조금 전까지 쌩쌩하게 잘 날던 비행기가, 갑자기 뒤꽁무니부터 균형을 잃는가 싶더니
공중에서 주익을 중심축으로 뱅글뱅글 돌며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이 아저씨. 뭐가 그리 놀란 표정이야?”
언제 따라 나왔는지 뒤따라온 설웅이 하늘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놀란 김병장을 팔꿈치로 툭 치자,
그제야 말문이 열린 김병장은 놀란 목소리로 하늘을 가리켰다.
“설웅! 저것 봐! 갑자기 추락하잖아!”
“응?”
밥 먹다 이게 뭔 난리인가 싶어 짜증난 표정으로 설웅은 시큰둥하게
하늘을 쳐다보더니 한쪽 입술 사이로 피식거리는 소릴 냈다.
“FRX가 저런 걸로 지랄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우리도 하와이서 저랬잖아.”
“야! 그래도 혹시!”
“걱정 마.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설웅이 미리 김병장의 김을 빼놓는 동안,
어느새 검은 점은 기체의 세부까지 알아볼 수 있도록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저거!”
“놀라지 말래두. 쑈하는 거니까.”
아니나 다를까.
“Беркут! Трансформация!”
“Да!”
리트비야크의 지시에 의해 베르쿠트는 뱅글뱅글 돌며 회전하는 기체의 기수 부분이 카나드 위치를 기준으로
반으로 갈라지며 뒤로 접혔고, 몸체와 엔진 블록이 팔과 다리로 변하면서
'Golden Eagle’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검은 자태를 활짝 드러내었다.
“자 자, 이제 좀 옆으로 피해주자고.”
“잠깐! 여기로 떨어지는 거야?!”
“그래요 타깃님아. 육군이면 육군답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낙엽이라도 피하라고.”
본인 때문에 베르쿠트가 저러고 있다는 걸 참 빨리도 눈치 챈 김병장은 허둥지둥 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물리와 중력제어기술의 결정체인 FRX라도 리트비야크 대위의 조종 기술은 일품이었다.
마치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사람처럼 자세를 잡은 베르쿠트는
공기를 가르는 굉음을 내며 그대로 초저공에 이르도록 자유낙하를 하더니,
지상 수십 미터의 위치에서 절묘한 중심 제어로 기체를 공중에서 세운 것이었다.
“우아앗!”
“그러게 피하라니깐.”
막사 아래로 피한 설웅과 달리 막사 앞 눈밭에서 허둥대던 김병장은 그만
베르쿠트의 급격한 자세제어에 의한 반작용으로 사방으로 휘날린 눈발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말았다.
“소령니임~!”
약 1시간 뒤.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나누크는 막사 앞에 선 УАЗ-3151에서 내리는 베르길로프를 향해
눈을 헤치며 달려가더니 펄쩍 뛰어서는 목덜미에 와락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왜 이러니 나누크. 겨우 하루 못 봤잖아.”
“히잉~ 하지만 밤에 무서웠다고요!”
“어이쿠, 좋아 죽는단다.”
화이트와 김병장을 회의 때문에 먼저 지통실로 보내놓고 나누크와 함께 마중 나온 설웅은
나누크의 엄청난 오버액션을 보며 할머니처럼 툴툴거렸다.
“왜? 이제 나누크 혼자서도 잘 자잖니?”
“하지만 밤에 이상한 꿈 꿨단 말이에요. 꿈속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확…”
“아주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해라. 잠깐, 그림자?”
나누크의 말을 들으며 투덜대던 설웅은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얼마 전에 자신도 비슷한 꿈을 꾸지 않았던가.
선명한 광학센서에 의해 비추어진 설원은 마치 맨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리고 그 선명함만큼이나 맑은 사파이어색 눈동자와 눈보다 더 흰 우윳빛 살결의 여성은
긴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을 지그시 감았다. 이윽고, 검은색 제복이 잘 어울리는,
정체모를 아름다운 여성은 무언가 결심한 듯 두 눈을 얼음칼날처럼 날카롭게 떴다.
“쳇, 하여간 그 아저씨 잔소리하고는. 남자가 장난친 것 가지고 그렇게 좀스럽게 나오나.”
도착하자마자 리트비야크에게 한바탕 퍼붓고 간 파벨 미코야노비치 수석기술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땀에 젖은 크림색 머리를 뒤적거렸다.
“대위님. 빨리 정리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회의에 늦겠습니다.”
도대체 갈 생각은 안하고 있는 자신의 파일럿의 짐을 MSN 베르쿠트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보고자 대신 챙겨주고 있었다.
“꼭 해야 하나? 피곤한데 좀 쉬게 해 주지.”
“그러게 피곤하신 분이 왜 그런 급기동을 하십니까.”
“너 자꾸 너 만든 제작사라고 편드는 거야?”
“중간 입장인 제 생각도 해 주십시오. 아무리 MSN이라도 눈치 보입니다.”
‘눈치’라고 변명하긴 했지만, 까놓고 말해서 베르쿠트 역시 ‘장난’으로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는
이 파일럿의 행동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녀가 파일럿으로 선정되자마자 자신의 별명인 ‘릴리야’에서 딴,
기수에 그려 넣은 큼지막한 백합꽃 퍼스널 마크는 마음에 들었지만 말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빨리 짐 챙겨서 가자.”
“그럴 생각이 드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늘색 파이핑이 옆선을 가로지르는 청색 정복의 베르쿠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작은 소리로 계속 이죽거렸다.
“나 참. 이 몸은 전투기 바닥의 살아있는 요정이라고. 그런 가녀린 날 제멋대로…”
“베르쿠트. 소리 안 줄이면 분사구에 미사일 박아버린다?”
“어머~ 들리셨어요? 그럼 재고 좀 해주실래요?”
“뒤질래요?”
걸걸한 성격의 리트비야크가 주먹 쥔 오른손을 쳐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격납고 바깥 먼 곳에서 불꽃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빛보다 느린 소리와 진동이 묵직하게 달려오며 리트비야크와 안에 있는 사람들의 내장을 뒤흔들었다.
“뭐지? 활주로 쪽이잖아!”
놀란 리트비야크는 침착하게 가늘게 눈을 뜨며 피어오른 불꽃을 주시했다.
조금 전 자신들이 타고 온 수송기가 불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은 그녀의 날카로운 시력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그 누구라도 땅 위에 130m나 되는 사람 형상의 기계를 못 알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계속>
아직 가지 마셈 밑에 RFRX-II '베르쿠트' 관련 이미지 더 있습니다.

몸통, 다리 : TU-160 FRX
오른팔 : SU-35 FRX
왼팔 : MIG-35 FRX
가슴 일부, 머리 : SU-47 '베르쿠트'
언제봐도 대조국은 일단 디자인에서 개로망.

75 :
그날 깊은 밤. RFRX 소대 숙소.
“으으으…"
2층 침대가 덩그러이 놓인 방 안에서 홀로 잠을 자고 있는 나누크는 담요를 꼭 끌어안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마치 악몽을 꾸는 사람 같은 표정인 그녀의 프로그램 속 세상은
도리어 들꽃이 만발한 푸른 들판이었다. 하지만.
“소령님? 소령님! 어디 계세요!”
문득 드넓은 벌판에 홀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누크는 꿈속에서 녹색의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들판을 온통 휘둘러보며 자신의 보호자를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온 사방에는 스치는 바람소리뿐이었다.
그 순간, 스치는 바람소리가 광풍으로 변하며 그녀의 백발단발을 마구 헤집었다.
“어? 꺄아아!”
등 뒤에서 스산한 기운을 느낀 나누크는 자신을 덮쳐 내리는 검은 그림자에 놀라며 잠에서 깨었다.
또 다시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가 창문을 덜그덕 덜그덕 두드리는 음산한 밤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북극곰은 황급히 자리 옆을 손으로 마구 짚어보았지만 꿈속에서 애타게 찾던,
언제나처럼 팔베개 하나는 해주셨을 소령님은 현실에서도 옆에 없었다.
“아! 아직 복귀 안하셨지!”
RFRX-II ‘Беркут’의 도착이 하루 지연됨에 따라, 덩달아 소령님도 오늘은 상급부대에서
묵으신다는 것을 떠올린 나누크는 아랫입술께 까지 담요를 꼭 붙든 두 손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하나도 안 무섭다. 하나도 안 무섭다. 하나도 안 무섭…”
그리고 잠시 뒤.
“으아아아아아아앙~”
“Чрезвычайная!”
“Чрезвычайная!”
“Чрезвычай…ная?”
갑자기 복도에서 애처로운 소녀의 비명소리에 졸지에 잠만 잘 자고 있던 기간부대와 경계 부대는
전투준비태세라도 울린 줄 알고 화들짝 깨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나누크는 자신이 부대 전체를 뒤집어 놓은 지도 모르고 그대로 설웅의 숙소로 냅다 달렸다.
“설우우우우웅~”
“뭐? 뭐야?!”
언제나 삐거덕거리던 낡은 문이 그 소리를 낼 새도 없이 급하게 열렸고,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나누크는 어둠 속의 사람 형상의 목에 착 달라붙었다.
“어엉~ 나누크 혼자 자기 무서워! 이상한 꿈 꿨단 말야!”
“커헉!”
뼈 꺾이는 소리와 함께 한바탕 벌어진 어둠속의 소란은
일어난 화이트가 벽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가관이네.”
“야 나누크. 나 여기 있거든?”
“응?”
양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누크는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화이트는 평소와 다름없는 반쯤 졸린 눈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설웅은 이층 침대에서 상반신을 거꾸로 한 채 1층 침대에서 질질 짜고 있는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꽉 조인 양 팔 안에는…
“커, 헉! 나, 나누크 소령님도 힘 세십니… 큵!”
아닌 밤중의 홍두깨를 당한 김병장이 뒷목이 꺾인 채
척수에 온 충격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품 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뭐야. 겨우 자다가 무섭다고 온 거야?”
“응, 나 되게 무서웠다고.”
“아이고 목이야…”
“이런, 호야도 이젠 혼자서 잘 자는데.”
상황종료된 방 안. 추리닝 차림의 셋에게 둘러싸인 나누크는
아직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간간히 코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었다.
“쯥.”
그림이라면 페인트 툴에서 채색되기 전의 자신의 외모와 똑같은 나누크의
애처로운 모습에 설웅은 입맛을 다시며 새집지은 머리를 긁적였다.
“할 수 없지. 여기서 자.”
“에헷~ 고마워! 역시 설웅은 날 알아준다니까!"
“알아주는 게 아니고 동정해 주는 거다.”
엉덩이에 곰 가죽털이라도 덮였을, 금세 울다가 금세 잘 웃는 나누크는
설웅만 바라보며 설웅이 뭐라 하건 생글거리기만 했고,
그 모습을 보며 화이트는 그 사이에 한대 다 핀 담뱃재를 빈 깡통에 털고 있었다.
“자, 그럼 됐지? 불 끈다. 자자고.”
“잠깐 화이트. 나 파스 좀 바르고.”
다른 장르에서는 엄한 쪽으로 자다가 여캐릭터들이 알아서 덮쳐주는게 남주인공이라지만
여기선 다른 의미로 덮쳐진 김병장은 이젠 필수품이 된 스프레이 파스를 목 뒤에 뿌리고 앉아 있었다.
“자, 그럼 진짜 불 끈다?”
“히힛! 난 설웅 옆자리~”
“어 그래. 근데 난 너의 소령님이 아니니까 자다가 더듬으면 죽인다.”
갑자기 무슨 정규군 기동훈련장이 아니라 단체로 수학여행 온 여학교 유스호스텔
같은 분위기가 된 방에는 또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김병장은 잠들 수가 없었다.
“…저기. 아가씨들?”
“아저씨는 또 뭐가 문젠데?”
머리 위 천장, 즉 2층 침대의 밑바닥 뼈대를 바라보며 김병장은 누운 채 질려있었다.
“저기 나랑 자리 좀 바꿔주면 안 돼? 그쪽 침대 가라앉으려고 하거든?”
“여자 셋이 올라갔다고 무너질 리가.”
“니들 MSN이거든요? 체중 1.5배 보정이시거든요?”
“이게 여자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신소리 닥치고 잠이나 퍼 자라고.”
“제바알… 자다가 여자 셋의 체중에 깔려죽었다는 소린 듣고 싶진 않다고.”
“왜. 영광이시지.”
김병장의 애원에도 설웅은 무심하게 나왔고, 나누크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으니,
이렇게 되면 덤터기 쓸 MSN은 한명밖에 없었다.
“끄응. 언니보다 짬 안 되는 내가 밑에서 자야지 뭐.”
아줌마 자리에서 겟업하시는 소리를 내며 화이트가 천천히 침낭을 걷고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이 김병장. 옆으로 좀 가봐. 자리 좀 만들라구.”
“제발 남자 취급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사람 취급이라도 좀 해주라 이것들아…”
어김없이 전날 쌓인 눈보라가 대지를 얼린 채 반짝이는 시베리아의 정오.
“СПАМ~!”
점심시간. 김병장이 가져온 스팸과 고추참치 통조림에 나누크는 쾌재를 부르며 누구보다 기뻐했다.
“응? 나누크 소령님도 스팸 좋아하십니까?”
“왜? 러시아는 스팸이 없을까봐?”
그냥 좋다고 바보처럼 생글거리는 나누크 옆에서 설웅이 그냥 습관적으로 핀잔을 주자,
김병장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뭐가 어때서 곰탱아! 물어보는 것도 안 되냐?”
“흥! 그러니까 무식하단 소릴 듣지!”
“자자, 어제 화해하고 오늘 또 싸우기야? 그만들 하고 밥 먹자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막대한 대 소련 원조물자엔 식료품도 물론 있었는데,
그 중에 두 가지가 바로 스팸과 콜라. 즉 짬밥에 스팸 곁들여 먹은 전통은 소련군이 한국군보다 훨씬 먼저.’
라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생략한 화이트는 먼저 숟가락을 들어
감자죽에 넣은 빵조각을 휘휘 돌린 뒤 한 숟가락 떠올렸다.
차고 넘치도록 떠올려진 밀가루와 전분덩어리가 먹음직스럽게 끈적이며 숟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갑자기 죽 위에 떠 있던 빵조각들이 진동모드의 휴대폰처럼 빠르게 떨리기 시작했다.
“Что?!”
“Что случилось!”
“Смотреть!”
식당 안의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말에 의해 웅성거리며 창밖을 쳐다보자, 하얀 설원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유리창이 깨질 것 같은 굉음과 진동이 막사 전체를 휘둘렀다.
“뭐야! 습격인가!”
굳이 김병장이 홀로 한국말로 너스레를 안 떨어줘도 화이트 빼고 다들 난리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아, 한사람 더 있었다. 누군고 하니 저쪽 식탁에서 혼자 식사중인 예게네프였다.
“왔구먼. 요란하시기도 해라.”
같은 시각. 훈련장 상공.
조금 전 소동의 주범. 전장 50m가 넘는 거대한, 그리고 아름다운 곡선과 각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순백색 초음속 폭격기가 다시 고도를 높여 선회에 들어가자,
그 옆으로 3대의 전투기가 호위처럼 따라붙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단일 기종으로 이루어진 편대가 아니라
마치 에어쇼의 시범비행 같은 각양각색의 전투기였지만 말이다.
[ 무슨 짓인가! 리트비야크 대위! ]
Ту-160 FRX 머리 위에서 비행중인 FRX Беркут 의 조종석 안에 앉은 여성 파일럿의
헬멧 스피커에선 깐깐한 중년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저기에 한국군 FRX 부대도 있다고 하기에 Беркут한테 인사 좀 하라고 했습니다.”
당돌한 캐릭터와 대립되는 깐깐한 인간이라면 너무 뻔 한 인물 배치였다.
더더욱 그 인물이 큼지막한 네모 안경에 비쩍 마른 중년인데다가,
연합설계국 수석기술자란 거창한 직함까지 달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 남자는 식상한 패턴에 완벽히 부합했다.
아무튼 이 사내는 뒤쳐져 오는 AN-22 수송기 안에서
휴대용 공간파 통신기로 생긴 것 답게 신경질적으로 왕왕거렸다.
[ 그게 인사인가?! 그러다 저 CCCP의 유물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아음속이었습니다. 별일 없잖습니까.”
[ 대위! 인민의 혈세로 만든 FRX가 장난감인줄 아나! 대체 국방부는 자네 같은 사람을! ]
더 이상 입씨름해봤자 피곤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리트비야크 대위는
헬멧과 연결된 마스크의 결합부를 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베르쿠트?”
“예 마스터…가 아니라 대위님.”
무언가 자신의 이름에서 정체성의 혼란이 왔는지 호칭을 실수한 뒷좌석의 MSN을 향해
리트비야크는 날 세운 손으로 허공의 무언가를 자르듯 흔들었다. 이윽고.
“윽! 그렇다고 통신을 끊어? 대위!”
성질이 뻗친 안경중년의 목울대에 힘이 솟는 걸 보며 옆자리의 베르길로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군도 참 괴짜를 뽑았군요.”
“소령. 보면 알겠지만 아주 미치겠습니다. 콱 옛날 같으면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도 시원찮을…”
“뻬레스뜨로이까가 언젠데 아직도 그런 소릴 하십니까.”
예게네프보다도 훨씬 젊으면서 훨씬 옛날 소리하는 이 사람에게 베르길로프는 한 번 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와아…”
막사 밖. 그 자신 역시 꿀릴 것 없는 3조 7천억\+VAT면제 탱크변신합체로봇을
모는 김병장은 하늘을 보며 솔직한 감탄사를 연발했다.
확실히 거대한 TU-160과 3대의 전투기가 편대를 이루어 막사 저편
간이 활주로로 날아가는 모습은 남자라면 누구나 가슴 두근거릴만한 장관이었다.
그것도 전투기의 엘프로 불리는 수호이와 미그라면 더더욱 말이다.
“대위님. 활주로가 너무 짧습니다.”
“그럼 어떡할까? 다리만 빼서 착륙할까?”
“대위님. 그건 스타스크림… USFRX 랩터도 안하는 짓입니다.”
그랬다가는 진짜 표절의 끝을 잡는다는 걸 잘 아는 금빛 도는 검정머리의 장발소녀는 딱 잘라 반대했다.
“할 수 없지. FRX로 변형해서 착륙한다. 이렇게 된 거
멀리 가지 말고 격납고 근처에 착륙하자고. 적절한 자리 좀 봐둬.”
“예. 대위님. …음?”
센서로 지상을 확인하던 베르쿠트는 스크린 하나를 확대했다.
그 스크린 속에는 막사 주변에서 비행중인 편대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한 군인이 있었다.
“대위님.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뭔데?”
베르쿠트가 리트비야크 옆에 작은 창을 띄우자 독수리눈의 그녀는 슬쩍 보는 것만으로
대번에 그 장면을 파악하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봐, 베르쿠트.”
“예.”
“다른 기체들은 격납고 쪽으로 보내. 그리고 지금 본체 조종은 나에게 맡겨.”
“알겠습니다.”
“좋아. 팬서비스라도 해줄까?”
편대의 선두를 날고 있던 베르쿠트의 백합꽃이 그려진 기수가 홀로 방향을 틀어
편대를 이탈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수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어? 뭐하는 거지?”
시리도록 푸른 하늘 속으로 사라진 검정색 전투기를 조금이라도 쫒기 위해 김병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작은 검은 점이 점점 급속도로 커져오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
분명히 조금 전까지 쌩쌩하게 잘 날던 비행기가, 갑자기 뒤꽁무니부터 균형을 잃는가 싶더니
공중에서 주익을 중심축으로 뱅글뱅글 돌며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이 아저씨. 뭐가 그리 놀란 표정이야?”
언제 따라 나왔는지 뒤따라온 설웅이 하늘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놀란 김병장을 팔꿈치로 툭 치자,
그제야 말문이 열린 김병장은 놀란 목소리로 하늘을 가리켰다.
“설웅! 저것 봐! 갑자기 추락하잖아!”
“응?”
밥 먹다 이게 뭔 난리인가 싶어 짜증난 표정으로 설웅은 시큰둥하게
하늘을 쳐다보더니 한쪽 입술 사이로 피식거리는 소릴 냈다.
“FRX가 저런 걸로 지랄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우리도 하와이서 저랬잖아.”
“야! 그래도 혹시!”
“걱정 마.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설웅이 미리 김병장의 김을 빼놓는 동안,
어느새 검은 점은 기체의 세부까지 알아볼 수 있도록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저거!”
“놀라지 말래두. 쑈하는 거니까.”
아니나 다를까.
“Беркут! Трансформация!”
“Да!”
리트비야크의 지시에 의해 베르쿠트는 뱅글뱅글 돌며 회전하는 기체의 기수 부분이 카나드 위치를 기준으로
반으로 갈라지며 뒤로 접혔고, 몸체와 엔진 블록이 팔과 다리로 변하면서
'Golden Eagle’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검은 자태를 활짝 드러내었다.
“자 자, 이제 좀 옆으로 피해주자고.”
“잠깐! 여기로 떨어지는 거야?!”
“그래요 타깃님아. 육군이면 육군답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낙엽이라도 피하라고.”
본인 때문에 베르쿠트가 저러고 있다는 걸 참 빨리도 눈치 챈 김병장은 허둥지둥 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물리와 중력제어기술의 결정체인 FRX라도 리트비야크 대위의 조종 기술은 일품이었다.
마치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사람처럼 자세를 잡은 베르쿠트는
공기를 가르는 굉음을 내며 그대로 초저공에 이르도록 자유낙하를 하더니,
지상 수십 미터의 위치에서 절묘한 중심 제어로 기체를 공중에서 세운 것이었다.
“우아앗!”
“그러게 피하라니깐.”
막사 아래로 피한 설웅과 달리 막사 앞 눈밭에서 허둥대던 김병장은 그만
베르쿠트의 급격한 자세제어에 의한 반작용으로 사방으로 휘날린 눈발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말았다.
“소령니임~!”
약 1시간 뒤.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나누크는 막사 앞에 선 УАЗ-3151에서 내리는 베르길로프를 향해
눈을 헤치며 달려가더니 펄쩍 뛰어서는 목덜미에 와락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왜 이러니 나누크. 겨우 하루 못 봤잖아.”
“히잉~ 하지만 밤에 무서웠다고요!”
“어이쿠, 좋아 죽는단다.”
화이트와 김병장을 회의 때문에 먼저 지통실로 보내놓고 나누크와 함께 마중 나온 설웅은
나누크의 엄청난 오버액션을 보며 할머니처럼 툴툴거렸다.
“왜? 이제 나누크 혼자서도 잘 자잖니?”
“하지만 밤에 이상한 꿈 꿨단 말이에요. 꿈속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확…”
“아주 미주알고주알 다 얘기해라. 잠깐, 그림자?”
나누크의 말을 들으며 투덜대던 설웅은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얼마 전에 자신도 비슷한 꿈을 꾸지 않았던가.
선명한 광학센서에 의해 비추어진 설원은 마치 맨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리고 그 선명함만큼이나 맑은 사파이어색 눈동자와 눈보다 더 흰 우윳빛 살결의 여성은
긴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을 지그시 감았다. 이윽고, 검은색 제복이 잘 어울리는,
정체모를 아름다운 여성은 무언가 결심한 듯 두 눈을 얼음칼날처럼 날카롭게 떴다.
“쳇, 하여간 그 아저씨 잔소리하고는. 남자가 장난친 것 가지고 그렇게 좀스럽게 나오나.”
도착하자마자 리트비야크에게 한바탕 퍼붓고 간 파벨 미코야노비치 수석기술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땀에 젖은 크림색 머리를 뒤적거렸다.
“대위님. 빨리 정리하시고 가셔야 합니다. 회의에 늦겠습니다.”
도대체 갈 생각은 안하고 있는 자신의 파일럿의 짐을 MSN 베르쿠트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보고자 대신 챙겨주고 있었다.
“꼭 해야 하나? 피곤한데 좀 쉬게 해 주지.”
“그러게 피곤하신 분이 왜 그런 급기동을 하십니까.”
“너 자꾸 너 만든 제작사라고 편드는 거야?”
“중간 입장인 제 생각도 해 주십시오. 아무리 MSN이라도 눈치 보입니다.”
‘눈치’라고 변명하긴 했지만, 까놓고 말해서 베르쿠트 역시 ‘장난’으로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는
이 파일럿의 행동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녀가 파일럿으로 선정되자마자 자신의 별명인 ‘릴리야’에서 딴,
기수에 그려 넣은 큼지막한 백합꽃 퍼스널 마크는 마음에 들었지만 말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빨리 짐 챙겨서 가자.”
“그럴 생각이 드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늘색 파이핑이 옆선을 가로지르는 청색 정복의 베르쿠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작은 소리로 계속 이죽거렸다.
“나 참. 이 몸은 전투기 바닥의 살아있는 요정이라고. 그런 가녀린 날 제멋대로…”
“베르쿠트. 소리 안 줄이면 분사구에 미사일 박아버린다?”
“어머~ 들리셨어요? 그럼 재고 좀 해주실래요?”
“뒤질래요?”
걸걸한 성격의 리트비야크가 주먹 쥔 오른손을 쳐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격납고 바깥 먼 곳에서 불꽃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빛보다 느린 소리와 진동이 묵직하게 달려오며 리트비야크와 안에 있는 사람들의 내장을 뒤흔들었다.
“뭐지? 활주로 쪽이잖아!”
놀란 리트비야크는 침착하게 가늘게 눈을 뜨며 피어오른 불꽃을 주시했다.
조금 전 자신들이 타고 온 수송기가 불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은 그녀의 날카로운 시력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그 누구라도 땅 위에 130m나 되는 사람 형상의 기계를 못 알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계속>

"제군들! 드디어 끝이 보인다아!!!"
엉엉 루트님아 너무 반가워요 엉엉 OTL
엉엉 루트님아 너무 반가워요 엉엉 OTL

몸통, 다리 : TU-160 FRX



언제봐도 대조국은 일단 디자인에서 개로망.

# by | 2009/10/23 00:22 | 크로와상 월드 | 트랙백 | 핑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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