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24일
자주국방 KFRX : 65
<링크-이전 화> 자주국방 KFRX : 64 화
65 :
3월 말.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센터 내 소유즈 기술센터 1 지하 모처.
높이 50m. 길이 300m 정도의 지하에 흰색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로봇 호랑이, 즉 '루트'의 잔해를 해체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마다의 작업에 몰두중인 기술자들의 손에는 일반적인 지구 표준의 공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지구의 표준 규격과 전혀 다른 루트의 부품을 해체해내기 위해서 부품을 통해 역설계한
전용 공구만이 그들과 루트의 일종의 연결점이 되어 주고 있었다.
"올려!"
한 기술자가 무전기에 대고 소리치자 작업장 꼭대기에 달려 있는 크레인이 체인을 서서히 감아올리자
해체된 루트의 가슴장갑판 일부를 기체 골조에서 분리해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어디 봅시다. 음…"
기술진들이 내부를 비추기 위한 작업등을 설치하는 사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검정 정장을 입은
긴 분홍머리의 여성이 기술진들을 해치고 안을 먼저 둘러보기 시작했다.
"흐음… 남은 게 없네요."
도대체 이 지하까지 왜 선글라스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분홍머리 여자는 선글라스를 두 손가락으로
살짝 끌어내리며 달리 말하면 "이거 누가 이랬어?!"라는 소리를 곱게 했다.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블랙푸딩을 잘라도 이것보다는 잘 알아보겠습니다."
만약에 이 루트가 '조종형'이라면 조종석이 있었을 거라 예상된 부위에 이리저리 뒤엉킨 고철더미를 가리키자
옆에 서 있던 정통 19세기 빅토리아풍 브리티시 메이드의 엄숙한 검정옷 위에 검소한 흰색 앞치마를 두른
'메이드풍 반달가슴곰'은 울컥하며 즉시 반응했다.
"흥! 전투중인데 그럼 저보고 어쩌라고요! 적기 가슴에 못 박고 빠루질이라도 할까요?"
"최근 UN의 방침은 나포할 수 있다면 최대한 나포하는 쪽이잖습니까.
그게 다 이 '조종석' 때문에 그런 거 잘 아시면서…"
컨커러의 공간파 롱소드처럼 순간적으로 공간파진동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 된 글라디우스 덕에,
그것도 설웅제가 핵심부위를 공격한답시고 '반드시 회수해야 할 파편'의 부분을 제대로 후벼놓았던 것이다.
"그럼 왜 나누크한테도 같은 얘기 하시지 그러세요? 그쪽은 아예 주포로 날려버렸다고요!"
"그게 그랬더니 그냥 "아, 예."로 끝이던데요. 그래서 이쪽에 약간의 희망을 걸었습니다만…"
"전투 중에 그런 거 가릴 수 있나요? 차라리 포케볼프나 제로센처럼
어디 불시착한 걸 요행으로 줍길 바라는 게 더 현명하죠. 왜 괜히 우리한테 와서 투정이세요?"
"휴우… 어딜 가나 FRX팀의 이유는 똑같네요. 이래서 전투팀은…"
"칫! 그렇게 애가 타면 직접 잡아오시던지."
안 그래도 MSN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Dr.Q 왔다 감'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는,
지금 입은 옷 덕분에 면도날보다도 더 예민해져 있는 설웅이 계속 까칠하게 굴었다.
솔직히 설웅으로서도 지금 들은 소리는 억울한 소리이긴 했다. 다른 국가의 FRX들에 비해 출격수 대비
신형 루트와의 조우율이나 전투 후 잔해 회수율은 꽤 높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죠. 설 소령님."
"왜요? 플라나리아 요원?"
"플라나리아가 아니라 플라미니아입니다."
졸지에 '무한회복번식동종섭취학습전이우주괴수'가 돼 버린 '플마미니아 카레'
AFRX가 무심한 듯 시크한 표정으로 보복성 발언을 했다.
"…그 복장은 취향이십니까?"
"윽."
설웅이 안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목 깊이 뭔가 걸리는 소리를 내고는 애써 태연침착하려고 용을 썼다.
"이거 가지고는 입도 뻥긋 마세요. 그놈의 변태 할아범 때문에 내가 아주… 당신들은 모르죠?
AFRX들은 프로그램에 절대명령어가 없어서 개발자한테 휘둘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왜 그러시죠? 생각보다 잘 어울리시는 것 같은데요. 말씀 나온 김에 저 스트로베리 티나 한잔 좀…"
"아니 이 아줌마가 하지 말라니깐!"
괜스레 시비가 붙어서 루트의 잔해 앞에서 티격태격하다 '사수'들을 바라보며
'부사수' 둘이 담담히 촌평하기 시작했다.
"…원래 소령님은 늘 저러십니까."
AFRX들의 특징 덕분에 '분홍머리 남자'라는 좀 야릇한 남자 AFRX의 말에 화이트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예. 언니는 정보부 쪽, 특히 AFRX들은 그렇게 신뢰하질 않습니다.
게다가 절대명령어 걸린 상태에선 워낙 예민해서 저도 잘 안 건듭니다."
"맨날 우리가 애써 격파하면 나 부쉈네 어쩌네 떨어진 걸로 생색내는 하이에나 아줌마!"
"저런, 하이에나라뇨. 그것보다 정보수집과 사후평가의 중요성을
간과하시는 분이 소령님이라니 저로서는 놀랍습니다."
"누, 누가 간과한데요! 그쪽에 자꾸 제 속을 긁잖아요! 아휴! 어딜 가나 얘네 들은 정말 재수 없어!"
설웅은 막 화를 내고 상대는 팔짱을 낀 채 요리조리 되받아치는 워낙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이런 광경이 생소한 러시아 측 기술자들은 영어로 뭐라 뭐라 싸우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만국공통의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나저나 오스티엔세 요원. 다른 국가에서는 발견됐답니까?"
그 말에 '오스티엔세 르블랑' AFRX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영국 쪽에서는 꽤 완전한 잔해를 포획했다고 하지만 역시 없었다는군요."
"흠… 그럼 여전히 저희가 부산에서 목격한 사례가 유일한 겁니까."
"예. '갈라드리엘', '공간이동', '조종석' 모두 그때 이후로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루트와의 정보전과 대침투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게 사실인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허허… 지금 제 청각회로가 받아들인 신호가 과연 요원님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AFRX에게 이런 견해를 듣는 건 처음인지라 화이트는 진심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오스티엔세는 오히려 화이트 쪽을 바라보며 이 견해를 수집정보보다도 더 굳게 믿는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타당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마치 녀석들이 던진 미끼만 물어대는 꼴이니까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의 노력은 허사란 겁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그런 수준까지 고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판단이지만요."
오스티엔세의 비관론이 펼쳐지는 동안 거의 다 타들어간 꽁초를 입에 문 화이트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나머지는 여기 분들하고 두 분이 알아서 해 주십시오. 저는 언니하고 가볼 데가 있어서 이만."
"알겠습니다. 샘플은 저희가 최선을 다해 분석하겠습니다."
"물론 그러셔야죠. 그러기 위해 FRX와 AFRX가 따로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화이트의 말에 이번엔 오스티엔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시 더블오 세븐 말이 맞았어요. 앙칼진 매력이 있으시다더니 그 옷 입고 그러시니까 한층 더 귀여우신데요."
"이년! 다투자!"
이역만리 웬수뎅이까지 끌고 들어와 거는 시비에 완전히 넘어간 설웅이 주먹을 꼭 쥐고는 자신보다 10cm는 더 큰
요원의 얼굴을 향해 한방을 날렸지만, 김병장에겐 항상 백발백중이던 그 주먹을 상대는 너무도 쉽게 피해버렸다.
"자 자, 언니. 진정하고 가자고."
어느 샌가 설웅의 등 뒤로 다가선 화이트가 포효하는 곰처럼 양 팔을 추켜올리고 도끼눈을 뜬 채
악악거리는 설웅의 양 팔을 붙잡고는 플라미니아에게서 떼어내자,
설웅은 마치 품 안의 떼쓰는 어린애처럼 양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며 징징거렸다.
"놔 이거 오늘 나 사고칠거야! 로봇이 말이야! 로봇이 애써 잡아왔으면 고맙다고는 하지 못할망정
맨날 투덜거리기나 하고! 남이 밥상 차려놓고 포크만 턱 올리면 되는 줄 아냐 이 날강도야!
보고서엔 정보분석 어쩌구 그런걸로 그쪽 공적이라고 써라? 아주 머리끄댕이를 확 뽑아버릴 테니까!"
"자 자, 진정하고, 모스크바까지는 갈 길이 멀다고. 그럼 수고하십시오."
"수고는 무슨! 화이튼 넌 쟤네들이랑 말도 섞지 마!"
며칠 뒤. 러시아 영공. 대하항공 LOCK-ING 777-200 KE 923편 일반석.
"저기요."
"예."
"커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장교 정복의 웃 저고리는 벗은 차림의 남자 승객의 주문에 이내 하늘색 복장의 스튜어디스는
하얀 플라스틱 컵에 커피를 따른 뒤 크림과 설탕과 함께 내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자 남자는 이내 아메리카노
그게 뭔가염 먹는건가염 맛있나염 우걱우걱 이라고 말하듯 주어진 크림과 설탕을 몽땅 찻잔에 부어 넣어
부대 자판기에서 흔히 뽑아먹던 다방커피를 만들어 빨간 플라스틱 납작 빨대로 휘휘 저어대었다.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사비 들여서 좀 좋은데 탈걸 그랬나."
설웅제 인수하러 혈혈단신으로 러시아 출장가게 된 김병장은 이래봬도 1,152,000원짜리의
좁은 일반석에서 굳어져가는 몸을 풀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이름 모을 샐러리맨의 선잠을 더 이상 방해할 수도 없는 터라 겨우 좁은 좌석에서
몸을 몇 번 움찔거릴 뿐, 이내 그냥 몸이 좌석에 익는 게 더 편하다는 걸 깨닫고는
커피 잔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 홀짝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부대 침대를 그리워할 때가 다 있네. …아, 훈련 때는 열외.'
어젯밤. 경기도 포천. KFRX 대대 정비중대 설웅소대 생활관.
"형부삼춘. 자요?"
러시아에 챙겨갈 짐을 미리 꾸려놓고는 잠을 청하는 김병장의 옆으로 다가온 염호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막 누우려던 김병장은 염호를 향해 다른 사람들의 잠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호야. 네 침대 가서 자."
"호야 오늘은 형부삼춘이랑 잘래요. 안돼요?"
어딘가 삼춘 소리만 빼면 성인인증 받고 들어야 할 소리였지만,
아무튼 김병장은 염호의 순수한 눈망울의 무언의 유혹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 삼춘 내일 가면 오랫동안 못 볼 텐데. 이리 와."
"네~"
어차피 안 된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도 없었는지 아예 배게까지 끌어안고 왔던 염호는 재빨리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형부삼춘~ 호야 팔베개 해주세요오~"
"어, 너 근데 생각보다 머리 무겁… 못들은 걸로 해라."
배게는 품에 껴안은 염호가 말 그대로 삼촌뻘 되는 김병장의 오른 팔을 베고 누운 채 담요 속으로 파고들었다.
"호야."
"예?"
김병장이 취침등의 붉은 장식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들 보고 싶어?"
"당연하죠. 호야 작은언니도 큰언니도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그래. 삼춘도 그리운 게 호야처럼 둘 다 보고 싶은가봐."
"형부삼춘은 좋겠어요. 호야보다도 먼저 언니들 만나고."
"하지만 호야는 MSN간 링크 하면 얼마든지 넷상으로는 만나잖아?"
"그래두 진짜 보고 싶은 걸요?"
"흠…"
사람들은 통신수단의 발달로 얼마든지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좋아할 때 그 몇 배의 수준의
데이터 통신 능력을 가지고도 마치 사람처럼 직접 만나지 않고는 살가울 수가 없다고 프로그램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 현대 문명의 모순점을 깊게 사유할 리 없는 김병장은 그냥 천장만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시야에 있던 텍스 천장은 어느새 여객기 안의 낮고 은은한 색조의 천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랜만에 얼굴 볼 생각을 하니 괜히 긴장되는데."
입맛을 쩝 다신 김병장은 창가 쪽에 던져놓다시피 벗어놓은 장교 정봉 저고리의 주머니를
손으로 슬쩍 더듬어보고는 반지함이 안에 제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러시아. 모스크바 바간코프스코이 국립묘지.
건조하고도 포근한 한국의 날씨와는 달리, 러시아인들에겐 이제 좀 따뜻해지려나 싶은 여전히 춥고 눈이 쌓인,
그래서 한층 을씨년스러운 모습의 묘지에 러시아군의 은회색 털이 깃에 덧대어진 회색 코트와
역시 같은 색과 재질의 다소 불규칙적인 형태의 은회색 털모자를 쓴 두 여군이 나타났다.
"화이트. 아직 시간 좀 남았지?"
털모자를 쓰느라 풀어놓은 은발머리를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휘날리며 화이트가 입을 열었다.
"응. 김병장 오려면 아직 시간은 있는데… 여긴 왜? 게다가…"
오는 길에 술도 못 먹는 설웅이 사오라고 한 보드카 병과 비스킷, 플라스틱 컵이 담긴 비닐봉지를
슬쩍 들어 보이는 화이트의 질문에 설웅은 어제와는 180도 다른 분위기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가 전에 얘기했던 사람. 여기 있어."
"음…"
딱히 대답할 말은 없는 화이트는 그냥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설웅과 함께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으며 비석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었다.
"그런데 묘비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
"나도 세르게이 소령 묻히고서 처음 온 거라 좀… 아, 저기 있다."
용케도 사방에 수수하게 세공된 철 울타리들과 중간 중간 검소하면서도 기품 있어 보이는 철 세공 십자가들이
앙상한 나무와 그보다 더 말라빠진 관목들과 엉켜 이루어진 빽빽한 비석들 속에서 빨리도 무덤을 찾아 낼 수 있었다.
키릴어로 '세르게이 크루지아스'라는 이름과 그 밑에는 '1977~2006' 이라는 전몰일이 적혀 있었다.
"미안해요. 좀 더 빨리 찾아오고 싶었는데."
설웅이 손에 낀 가죽장갑을 벗고서는 맨 손으로 묘비 위의 눈을 쓰다듬듯이 털어내는 모습에
화이트는 속으로 지금 나오는 상냥함의 반의반만 김병장한테 해 줘도 김병장은 살판 날 거라고 생각했다.
"저 많이 변했죠? 그때 이후로 많은 일들 있었는데…
아, 이쪽은 제 동생. 화이트 메탈이라고 합니다. 화이트. 인사해."
"어. 알았어 언니. 잠깐만."
이윽고 까라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보드카의 병뚜껑을 딴 화이트가 장갑을 벗은 손으로 컵에 술을 담아서는
묘비 앞의 네모나게 가공된 돌 위에 비스킷과 함께 올려놓고는 자세를 고치고 엄숙하게 경례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방군 육군 소속 KFRX-I 설웅제의 FCS MSN. 화이트 메탈 대위입니다."
"든든해 보이죠? 좋은, 아니 정말 좋은 동생이에요."
"언니."
"응?"
"이 분 담배 피우셨어?"
보통 설웅이 하는 짓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상상이 안 갈 장면인 양 손을 다소곳이 모은 설웅이
제자리에 선 채로 말없이 고개만 천천히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술만 있으면 섭섭하지."
말을 마치자마자 화이트는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말보로 레드 담뱃갑을 꺼내더니
담배 한 개비를 골라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며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원래 어떤 담배 피시던 분인지는 몰라서 바꿔 피게 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천천히 타들어가기 시작한 담배개비를 술잔 옆에 살며시 놓은 화이트 역시 언니를 따라 엄숙한 자세를 취했다.
"다시 만나면 이 말 꼭 전하고 싶었어요."
좀 심하게 적응은 안 되지만, 처연하고도 청초한 분위기의 설웅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고마웠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몇 시간 뒤, 모스크바 제 2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 국제선 대합실.
유리창 밖의 활주로에는 좌우로 쌓인 흰 눈이 저물어가는 오후의 햇살에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가운데,
큼직한 여행용 캐리어를 질질 끌며 나타난 김병장은 마중 나온 사람을 찾는다기 보다는
초식동물이 맹수가 어디 있나 파악하는 듯 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저기 있다! 아저씨! 여기!"
"으윽!"
어째서 자신이 숨을 생각부터 하는지 알 수 없는 김병장은 이것이 길들여졌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쭈뼛쭈뼛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다! 화이트! 아저씨 맞지?"
"여기서 언니한테 겁먹을 사람은 김병장 밖에 없으니까 맞겠지."
아니나 다를까. 똑같은 걸로 보아 군복인 듯 한 회색 코트를 입은 두 자매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하아… 나도 여기까지인가."
심한 긴장감으로 김병장이 심장까지 쿵쾅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보고 싶었어~"
절대 그럴 리 없는 설웅이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양 팔을 벌리고는 포옹하는 듯 한 포즈로
이쪽을 향해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오는 것이었다.
"어? 어! 그,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젠장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김병장은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팔을 벌리려던 순간,
설웅은 김병장 옆을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통과해버린 뒤 김병장이 끌고 있던 캐리어에 와락 달려들었다.
"뭐, 뭐야…"
왠지 강력하게 공기 취급당한 느낌의 김병장이 그대로 돌처럼 굳어져있는 동안
설웅은 캐리어의 지퍼를 열고는 가방 안을 마구 뒤지더니 환호성을 터트렸다.
"어디 보자… 있다!"
분명 군복으로 보이는 옷들을 입은 남녀가 한 사람은 엉거주춤하게 굳어있고 한사람은 옷가방을 마구
헤집어놓는 광경과 눈 마주칠까 싶은 러시아인들이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설웅은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어헝~ 얘들아! 정말 보고 싶었어~"
가방 속에서 꺼내 설웅이 품에 안고 너무 좋다는 표정으로 얼굴에 비비는 짐더미.
그건 다름 아닌 비닐봉지에 쌓인 팩 고추장과 '소밥'이라 불리는 II형 건조 전투식량들이었다.
"…야. 난 전투식량만도 못한 거냐."
"아미안오랜만이야반가워보고싶었어그동안잘있었지아픈데는없고이정도면됬어?"
무미건조하고도 무성의하게 국어책 읽듯 나오는 대답에 김병장은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난 갑자기 그러 길래 포옹이라도 하려는 줄 알고…"
그러자 조금전 묘지에서 보여준 진지모드는 3초 버프였는지 원래대로 방정을 떨던 설웅이
전투식량은 여전히 품에서 안 뗀 채로 고개를 돌려 두 눈을 깜빡거리며 김병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머? 내가 왜 아저씨랑 그딴 짓을 하는데?"
"…어 잠깐. 생각해보니 그러네."
곰곰 생각해보니 자신이 분위기에 휩쓸렸다는 걸 깨달은 김병장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이건 국방정훈물이다!'라고 삼세번 외치는 동안, 언니보다는 그래도 배려심이 많은 화이트가
김병장에게 다가와 좀 더 성실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오랜만이야 김병장. 일반석이라 많이 피곤했을 텐데."
"딱히 뭐 피곤할 것 까지야. 오랜만에 잠이나 실컷 잤지 뭐."
"호야는 잘 있고?"
"아 참. 호야가 안부 전해달래. 언니들 빨리 보고 싶다고."
"그래? 호야도 별 일 없는 거지? 안 그래도 저번에 혼자 전투를 겪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호야도 많이 컸으니까."
"그럼 다행이고."
항상 무뚝뚝한 표정의 화이트가 오랜만에 염호의 소식을 현실에서 직접 듣고는 살짝 미소를 보이며
안도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설웅은 내색을 하기 싫은건지 진짜 관심이 없는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끝까지 전투식량에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
"아아~ 이 녀석들을 어떻게 먹어줄까?"
"아 저기… 설웅?"
"그래! 한밤중에 김치비빔밥에 고추장을 듬뿍 넣어서 비벼먹어야지~"
개량 받으러 와있는 몇 달 동안 고추장은 커녕 라면조차 구해먹을 시간도 없었던 설웅은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져 김병장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질 않자, 슬쩍 부아가 치민 김병장이 설웅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곰탱아!"
"누가!"
'어디 천하의 나같이 인텔리하고 아리따운 소녀를 곰탱이래!'라는 표정으로 설웅이 김병장 쪽을 획 돌아보자,
눈앞에 웬 반지함 하나가 떡하니 김병장의 손에 들려 있었다.
"먹을 것만 신경 쓰지 말고 이것도 좀 보라고! 선물이니까!"
"응? 웬 선물?"
줄만한 사람도 아닌 사람이 웬 반지함을 내미나 싶은 설웅이 김병장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슬며시 손에서 반지함을 빼앗아 뚜껑을 살며시 열었다.
"와아~"
그리고는 순식간에 설웅의 표정은 감격 그 자체의 표정으로 변했다. 반지함 안에는 백금의 몸체에 아름답게 세공된
1캐럿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며 자리 잡고 있…지 않고 반짝거리는 중령 계급장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축하드립니다. 중령 진급예정자님."
"정말 나 진급하는 거야?"
만년 소령이던 설웅은 자신의 진급소식을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복귀하는 대로. 이건 그 전에 알려주려고 내가 사온거야."
"이봐 김병장. 나는?"
"물론 여사님도 진급하죠. 자. 이건 화이트 꺼."
김병장이 이번엔 소령 계급장이 들어있는 다른 반지함을 꺼내 화이트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중위님."
"자, 그럼 이제 뭐하지? 나 배고픈데 일단 뭐 좀 먹으러 가자.
처음으로 러시아도 왔는데 하다못해 모스크바 시내 구경이라도 해야지?"
뜻밖의 소식을 정보우세로 이용해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오판한 김병장이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설웅과 화이트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씩 웃었다.
"…야, 왜 웃어?"
"그래. 시간이 없긴 없으니까. 서두르자고 아저씨."
설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자매는 김병장의 오른쪽과 왼쪽 팔에 팔짱을 끼웠다.
문제는 그게 어디 놀러가거나 양손의 꽃에서 나오는 그런 팔짱이 아니라 '죄수 호송'의 팔짱이었다.
"어어? 뭐하는 거야?!"
"뭐하긴. 바쁘니까 이러는 거지. 가자 화이트."
"알았어 언니. 자, 김병장. 회포는 나중에 풀자고."
"야! 지금 어디 가는데?!"
마치 '면식범에게 납치'당하는 기분으로 김병장이 자신의 양쪽을 번갈아 보며 당황해했지만
그런 김병장의 반응에도 화이트는 눈 하나 깜짝 안하며 대수롭잖다는 투로 대답했다.
"Сибирь."
"…아, 시베리아.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시베리아?!"
"자 자, 시간이 없어 아저씨.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 두고 순순히 따라오라고!"
"갑시다. 이반 데니소비치씨. 시베리아도 알고 보면 괜찮은 동네야."
"자, 잠깐! 난 놀러, 아니 설웅제 인수하러 온 건데 웬 시베리아!"
"몰라서 물어? 인수하기 전에 장비 테스트는 해야 할 것 아냐. 빨리 가자. 수송기가 우릴 기다린다고~"
"잠깐! 모스크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엘프언니들은! 이게 아냐! 잠깐! 나에게 기회를! 제발!"
"국방부가 미쳤다고 비싼 국방비로 아저씨 여행보내줄리가 없잖아!"
"젠장! 또야?!"
마치 NKVD에 끌려가는 정치범처럼 김병장은 두 자매에 의해 '압송'됐고, 이윽고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향해
한대의 러시아 공군 수송기가 멀고 먼 동토의 땅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계속>


# by | 2009/06/24 08:52 | 크로와상 월드 | 트랙백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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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이전 화> 자주국방 KFRX : 65화66 : 벨호얀스크. 사하공화국. 동시베리아 상공…이 아니라 예카테린부르크 인근 서시베리아 상공. 우랄산맥을 넘은 덜컹거리고 시끄러운 러시아 공군의 ... more
미르카시아님 - 저인간 인생에 볕들날이 있다에 제 엉덩이를 겁니다.(???)
명경지수님 - 설웅제를 집어탄 죄.(…뒤끝심한 설웅)
이지리트님 - 목에 밧줄걸고 찾아간 격이지요.(김병장. 감을 잃었어…)
챠빌님 - 아니 잠깐 나온 호야에 모에사하시면 O>-<